지금까지의 지도는 제도의 자리를 그렸다. 이 항목은 한 사람의 자리를 그린다.
좌표평면에 찍힌 점들은 교단이다. 사람은 거기서 하나를 고르거나 고르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 신앙 생활에서 사람이 겪는 이동은 그 지도 위에 나타나지 않는다. 같은 교회에 앉아 있으면서 속으로 완전히 다른 곳에 가 있는 경우가 흔하다.
이 항목은 그 이동의 축을 그린다. 신학사조 항목에서 상자를 셋으로 나눴던 것과 같은 작업이다. 제도의 위치와 개인의 위치는 다른 대상이므로 같은 그림에 겹치면 둘 다 흐려진다.
근본주의 — 성서의 기적과 창조와 동정녀 탄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원래는 1910년대 미국의 특정 운동 이름이었고, 여기서는 가장 보수적인 자리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쓴다.
문자주의 — 근본주의 아래에 따로 둔다. 성서를 인간의 세계관이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기록으로 보는 태도다. 근본주의가 신학 안의 보수적 입장이라면 문자주의는 신학 자체와 거리를 두는 쪽에 가깝다. 근본주의 강령을 만든 사람들 가운데도 진화생물학이 사실로 밝혀지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 온건한 이들이 있었다. 둘이 같지 않은 이유다.
복음주의 —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갱신 운동. 종교개혁이 그 출발이고, 이후 제도가 굳을 때마다 반복해서 나왔다. 캠퍼스 선교단체도 이 계보다.
교조주의 — 신앙고백과 직제가 정체성을 만든다. 건강할 때는 공동체를 세우는 틀이고, 힘이 실리면 고백 밖의 모든 것을 이단으로 보는 칼이 된다.
에큐메니컬 — 각 교단이 자기 컬러를 유지하면서 서로 대화하자는 운동. 교단 색을 지우는 것이 아니다. 이 오해 때문에 한국에서 오래 공격받았다.
자유주의 — 현대 신학의 성과로 기독교를 다시 구성하려는 흐름 전체.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소수 그룹의 목소리만 가져오면 이 말이 왜곡된다.
불가지론 — 알 수 없다는 자리. 그 안에서 갈린다. 알 수 없지만 겸손하게 성서를 사랑하며 함께 있겠다는 쪽과, 알 수 없으니 그만두겠다는 쪽이다.
무신론 — 여기서도 갈린다. 신은 없지만 기독교를 아끼고 계속 읽고 연구하는 쪽과, 기독교를 인류에게 해로운 집단으로 보는 쪽이다.
괄호는 하나이고 끝에서 끝까지다. 근본주의부터 무신론까지, 아래의 문자주의까지 전부 들어온다.
예배 공동체의 범위와 넓은 의미의 기독교 운동의 범위를 따로 그리지 않는다. 같기 때문이다. 함께 예배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기독교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르지 않다.
이렇게 그리는 이유는 실제가 그렇기 때문이다.
길섶교회에 신은 없다고 정리한 분이 다닌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는 분도 있다. 한국예수교회연대에는 비종교인이 함께한다. 이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앉아 있고, 그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학 이론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존중하고 배워 가려는 열린 태도다.
이 문장 하나가 이 그림 전체를 대신한다. 어느 칸에 있느냐는 묻지 않는다.
전투적 근본주의는 오지 않는다. 오더라도 함께 있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지킬 목록을 정하고 그 밖을 잘라내는 것이 그 자리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투적이지 않고 열린 마음의 근본주의가 있다. 그런 분은 온다.
전투적 무신론도 마찬가지다. 기독교를 인류에게 해로운 집단으로 보는 자리에서는 같은 모임에 있는 것이 서로에게 무리다. 하지만 신은 없다고 정리한 채로 기독교를 아끼는 자리가 있다. 그런 분도 온다.
문자주의도 그렇다. 이 지도에서 문자주의를 아래에 따로 둔 것은 신학과 거리를 둔 자리라는 표시일 뿐 배제의 표시가 아니다. 문자주의 안에서 평생 선행을 베풀며 사는 분이 있다.
그래서 이 그림에는 칸을 반으로 나누는 선이 없다. 닫힌 자리는 스스로 밖에 선다.
이 구분은 2022년 영상에서 처음 정리한 것인데, 범위가 그 뒤로 넓어졌다.
그때는 예배 공동체의 범위를 복음주의의 열린 절반에서 긍정적 불가지론까지로 그었다. 무신론은 밖이었다. 예배가 한 축인 모임에서 신이 없다고 정리한 사람에게 예배는 맞지 않는 옷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르게 본다. 그 판단이 틀렸다기보다, 실제로 그런 분들이 오셨고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배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정하는 것과 자리가 없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것을 사람을 통해 배웠다.
근본주의 쪽도 같다. 그때는 전투성과 근본주의를 구별하지 않았다. 지금은 구별한다.
바뀐 것은 신학이 아니라 경계선을 어디에 긋는가다. 그리고 그 선을 신학에서 태도로 옮겼다.
사랑의 실천이다.
신학의 정확성이 아니고, 고백의 일치도 아니고, 예배의 형식도 아니다. 이웃을 향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다.
이 기준으로 보면 지도가 다르게 읽힌다.
신학은 자유롭게 하면서 아무 실천도 사랑도 섬김도 하지 않는 자리가 있다. 문자주의 안에서 평생 선행을 베풀며 사는 자리가 있다. 왼쪽 끝에 있는 사람이 오른쪽 끝에 있는 사람보다 이웃에게 더 나은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이 스펙트럼은 등급표가 아니다.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는 도구일 뿐이고, 함께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물음이다.
이 구분이 필요한 이유를 한 사람의 궤적이 보여준다.
근본주의에서 시작했다. 무디성경학교를 거쳐 휘튼으로 갔고, 성서를 무오한 텍스트로 읽었다.
복음주의로 옮겼다. 여전히 신앙 안에 있었으나 목록의 방식과는 거리가 생겼다.
사본학으로 갔다. 프린스턴에서 브루스 메츠거 밑에서 본문비평을 공부했다. 신약 사본들 사이의 차이를 다루는 일이다. 무오한 원본이 우리 손에 없다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는 작업이었고, 이것이 그의 이동에서 결정적 지점이었다.
지금은 무종교다. 신의 존재도 부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신약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고 있고, 대중에게 본문비평을 알린 규모에서는 이 분야의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
그림의 붉은 점선이 그 경로다. 왼쪽 끝에서 출발해 오른쪽 끝까지 갔다.
그는 괄호 안에 있다. 무신론자라는 것이 배제의 사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를 아끼고 계속 읽고 연구한다. 예배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정한 것과 자리가 없는 것은 다른 일이다.
이 사례를 다룰 때 조심할 것이 하나 있다. 근본주의나 문자주의와의 논쟁에서 그의 작업을 가져오는 것은 유익하다. 다만 그가 도달한 결론까지 신앙의 언어로 옮기는 것은 그의 뜻도 아니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분명히 밝혀 두었다.
이 그림의 실제 목적은 범위 표시가 아니다.
근본주의에서 무신론까지 브레이크 없이 통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20~30대다. 한국 교회의 문자주의와 교조주의에서 심하게 상처를 입고, 자유주의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지 못한 채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 하나에 걸려 넘어지고, 곧장 무신론까지 간다.
이동의 동력이 신학적 판단이 아니라 상처받은 감정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자기가 무엇을 지나쳤는지 모른 채 지나간다.
「숫자로 보는 지형」의 그래프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개신교인 가운데 교회에 나가지 않는 비율이 20대에서 45퍼센트다. 그리고 비종교인 가운데 과거 신앙 경험이 있는 비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한 번 완전히 나가면 돌아오는 통로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긍정적 불가지론이 마지노선인 이유가 여기 있다. 거기서 멈추면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어만처럼 오른쪽 끝까지 가서도 기독교를 아끼며 계속 연구하는 경로가 있다. 다만 그것은 신학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의 경로다. 상처받아 빠르게 미끄러지는 20대가 그 자리에 착지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닿는 곳은 대체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다.
| | 좌표평면 | 이 스펙트럼 |
|---|---|---|
| 무엇의 위치 | 제도 | 한 사람 |
| 축 | 성서 읽기 × 결정 구조 | 확신의 강도와 열림의 정도 |
| 이동 | 거의 없다 | 자주, 빠르게 |
| 빈 곳이 뜻하는 것 | 형태가 없다 | 멈출 자리가 없다 |
두 지도의 빈 곳이 같은 곳을 가리킨다. 오른쪽 위에 제도가 없다는 것과,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는 사람에게 멈출 자리가 없다는 것은 같은 사실의 두 면이다.
이 지도의 목적은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는 것이다. 알면 남을 수도 있고 옮길 수도 있다. 모르는 채로 미끄러지는 것만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