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희성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1부
읽은 글
길희성,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 탈종교 시대의 그리스도교 신앙』(2021 개정판). 이날은 1부 「위기의 신앙, 교회 너머의 신앙」을 중심으로 읽었다.
저자의 진단은 이렇다. 교회의 위기는 도덕적 타락이나 신뢰 추락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지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낡은 메시지를 계속 말하고 있다는 것, 곧 신학의 부재가 더 큰 문제다. 합리적 사고를 교회 밖에서는 하면서 교회 안에서는 접어두는 이중 태도가 반복되면서 묻지 마 신앙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신앙을 다시 정의한다. 신앙은 어떤 명제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신뢰다. 성서는 사실의 언어가 아니라 고백의 언어로 읽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틀렸거나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니어도 그 안에 다른 진리가 담길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 고백이다.
책이 겨냥하는 것은 복음주의다. 데이비드 베빙턴의 네 특징 — 성서주의, 십자가 중심주의, 회심주의, 복음 전파 — 을 짚되, 한국에서 이것이 근본주의와 거의 구별 없이 작동한다는 점을 문제로 본다. 대속 죽음과 영혼 구원에 집중하는 구조가 결국 배타성으로 귀결되며, 그것은 나중에 생긴 부작용이 아니라 씨앗부터 그럴 수밖에 없는 출발점이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이날의 질문
이 비판은 누구를 향해야 하는가.
책 내용에는 대체로 동의가 모였다. 그런데 논의가 뜨거워진 자리는 내용이 아니라 비판의 사정거리였다. 옳은 말이 누구에게 닿을 때 무엇이 되는가. 이 물음이 세 시간 내내 되돌아왔다.
쟁점 하나 — 화살이 닿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
첫 발언이 이 자리를 열었다. 지성인들이 이해한 성서 이해가 보편적일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 그 취향이 맞는 사람에게는 폐부를 찌르지만, 이런 방식의 공부가 닿지 않는 신자들이 훨씬 많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평생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온 권사님이 이 창에 찔려야 하는가. 저자가 싸우려던 대상은 그분이 아니지 않은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쏘아붙이는 비판인데 그 화살이 착한 권사님에게 닿지 않았으면 좋겠다.
반론이 아니라 범위 제한이 이어졌다. 어른들에게는 지구가 평평하든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문제는 청년과 청소년이다. 과학 시험을 일부러 0점 받으며 그것을 시련이자 하나님의 테스트로 소화하고 있던 청년의 사례가 나왔다. 그렇게 되면 삶의 선택지가 어린 시절부터 제약된다. 천국·지옥 영상으로 청소년을 가르치는 자리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갈라진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개입의 정당성이다. 바뀌지 않을 사람은 존중하고 놔두자는 쪽과, 진로와 삶이 걸린 자리에는 개입해야 한다는 쪽. 둘 다 같은 사람에게서 나오기도 했다.
쟁점 둘 — 비판의 강도
비판이 과한가, 적절한가, 약한가. 세 답이 다 나왔다.
과하다. 비판할 때 그 대상을 저급하게 묘사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도 그렇다. 여기저기서 파편을 모아 가장 보수적이고 나쁜 교회를 하나 만들어 놓고 그 허상을 가격하는 느낌이 있다. 실제로 그 모든 것을 다 갖춘 교회는 없다. 구원파를 비판하는 외부 전문가들의 묘사가 늘 실제와 어긋났다는 경험이 근거로 나왔다. 그 신학이 옳다는 말이 아니라, 비판이 정확했던 적이 없다는 관찰이다.
적절하거나 약하다. 선명함을 드러내려면 이 화법이 맞다. 오히려 더 세게 가도 된다. 교회에 대한 어떤 비판을 봐도 과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는 발언도 나왔다.
그대로다. 책에 적힌 교회가 자신이 겪은 교회와 정확히 같았다는 증언도 있었다. 리얼함의 정도가 사람마다 다른 것이지 묘사가 틀린 것은 아니라는 쪽이다.
한 사람이 자기 반응을 스스로 이상하게 여기며 던진 말이 이 쟁점의 성격을 드러냈다. 이 책이 가장 좋았고 취향에도 맞았고 다른 자리에서라면 변호할 텐데, 왜 이 자리에서는 자꾸 아쉬운 점만 말하게 되는지 모르겠다는 것.
쟁점 셋 — 왜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강단에 오르지 않는가
책에 나오는 지적 — 신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는데 교회에서 적용되지 않는다 — 이 여러 사람에게 충격이었다.
현장 경험이 답으로 나왔다. 지금 교회에 있는 목사들 중에 저자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다만 말하면 잘린다. 위로는 리더십, 아래로는 성도들의 집단 권력이 함께 작동한다. 비공개 소그룹에서 이 책을 다루는 것은 괜찮지만 공개 강단에서 말하면 아웃이다.
한국 교회 100곳 중 몇 곳에서 이 내용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10퍼센트와 2퍼센트가 나왔다.
창조과학을 가르치면 안 된다고 말했다가 교회가 뒤집힌 경험도 나왔다. 목사들은 창조과학이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교인이 많아 강사를 부른다. 아무도 나서서 함께 싸우지 않는다.
결국 돈 문제라는 진단으로 모였다. 20대에는 말할 수 있는데 30대, 40대가 될수록 어려워진다. 머리로는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아는데 아무도 저항하지 못하고 그것이 수십 년 반복되는 힘 — 그 힘을 인격적 악마로 믿지는 않지만 사탄이라 부를 만하다는 말이 나왔다.
쟁점 넷 — 예수는 죽으러 왔는가
가장 많은 정보가 오간 자리다.
전통적 형벌 대속 교리 — 죄를 지었으면 피값을 내야 하고, 모든 인간의 피를 흘릴 수 없으니 신 자신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틀 — 는 중세에는 없었고 근대 이후 복음주의 운동에서 유행하며 대학 선교단체와 열심 있는 교회로 흡수되었다는 설명이 있었다. 레위기 제사도 피만이 아니라 곡물을 태우는 제사가 함께 있고, 그 체계의 뜻은 현대 학자들도 합의하지 못한다.
성서 안에도 예수의 죽음을 설명하는 언어가 여럿이라는 정리가 이어졌다. 유월절 어린양은 해방에 대한 감사, 화목제는 공동체성의 회복과 함께하는 식사, 고대 기독론에는 예수의 죽음이 천사와 악마의 전쟁에서 전세를 뒤집는 사건으로 보는 갈래가 있다. 현대신학 쪽에는 신이 세계에 간섭하는 방식이 강제가 아니라 설득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언어로 읽는 갈래가 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됐다.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고, 갈리는 것은 해석이다. 필연적으로 죽어야 했다거나 반드시 십자가여야 했다고 보지 않는 것이 현대신학에서는 상식에 가깝다. 예수가 죽지 않았다면 신은 어떻게 일했을까를 함께 상상하는 것이 이 물음의 실제 내용이다.
여기에 세 가지 문제 제기가 붙었다. 아들을 죽여야 용서하는 신이 되고, 예수가 대신 죽었으니 나는 괜찮다는 태도가 되고, 십자가가 죄와 죽음을 교환하는 거래 구조가 된다는 것.
그리고 반대 방향의 유보가 나왔다. 겟세마네의 기도 — 이 잔을 피하고 싶다는 고뇌와 그럼에도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는 고백 — 는 이미 기술된 언어로서 뛰어나다. 이것을 고정된 공식으로 못 박을 필요는 없지만, 이 구조를 깰 만큼 매력적인 다른 이야기가 생각보다 없다. 상상력이라는 말은 옳지만 기존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지어야 성립한다.
대속 언어를 고백 언어로 읽자는 제안이 여기서 나왔다. 아내에게 "난 진짜 너밖에 없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진심이지만 일상은 그 말과 어긋나게 흘러간다. 그렇다고 그 고백이 거짓은 아니다. 언어는 그 순간을 제대로 포착하면 사람을 살리고, 그 순간을 놓치면 폭력이 된다.
쟁점 다섯 — 배타성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2부의 주제인데 시간 안에 일부가 다뤄졌다.
가브리엘 보카치니의 논의가 소개됐다. 바울에게 구원의 길이 셋으로 열려 있다는 것. 구약을 경전으로 믿는 유대인에게는 그들의 길이 있고, 예수를 만난 사람에게는 그 길이 열렸고, 로마서와 아테네 연설에는 신성이 온 세계에 내재한다는 전제 아래 기독론 없이 말하는 대목이 있다. 바울은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적으로 예수를 만났기에 거기에 인생을 걸었다는 것이다.
신 이해 쪽에서는 초자연주의 신 개념을 내려놓는 것이 현대신학의 분기점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유일신의 '하나'를 숫자로 읽지 않고 규정할 수 없는 무한으로 열어두면 유일신앙이 배타가 아니라 보편이 될 수 있다. 저자가 아버지·왕·주님이라는 호칭을 줄이자고 반복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여성신학이 백 년 동안 해온 이야기다.
다른 방향의 발언이 이 쟁점을 가장 멀리 끌고 갔다. 배타성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배타성 없는 신앙이 가능한가.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면 문제는 배타성의 유무가 아니라 톤과 매너다. "예수 외에 길이 없다"는 말도 너무 진지하게 듣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다양한 말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진보라는 것.
이에 대해 같은 문장이라도 살랑살랑 말하는 사람과 도끼 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가격한 것이 아닌데 맞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발생한다는 답이 나왔다. 다만 지금은 일반 사회가 그런 언어를 쓰는 기독교인을 무서워하는 상황이므로, 안에서도 통하고 밖에서도 테러 집단으로 읽히지 않는 언어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데로 정리됐다.
곁가지 — 복음주의에서 배울 것
내용 비판과 별개로 장점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신앙의 효능감이 빨리 확인된다는 것. 술을 절제했다, 새벽기도에 나갔다처럼 스코어가 보이니 레벨업이 빠르다. 심플하기 때문에 대학생에게 잘 통했고 실제로 효과도 있었다.
공부 쪽으로 가면 정리에 너무 오래 걸려서 흥미를 잃게 된다. 깊이 들어가는 것과 심플하게 정리하는 것이 반반은 되어야 모임이 유지된다. 그러지 않으면 탈출한 사람들의 교회가 전부 지식인 엘리트 교회가 된다. 복음주의는 잘못된 정보를 심플하게 다루는 문제가 있지만 지식주의로는 가지 않는다 — 내가 더 잘 안다는 우월감으로 가지는 않는다는 관찰이다.
곁가지 — 옳음의 폭력성
창조과학을 두고 나온 발언이 이 모임에서 가장 멀리 간 지점 중 하나다.
무엇이 옳은지는 이미 안다. 그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보다 이런 충돌이 왜 일어나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창조과학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 어떤 불안을 느끼는가. 그들을 변화를 거부하는 구태한 존재로 두고 막연한 혐오를 가진 채 우월한 지식을 설파하는 것에는 폭력성이 없는가.
창조과학이 가진 잠재적 폭력성과 그것을 계몽하려는 쪽의 폭력성에 차등을 두지 말고 둘 다 고려해야 한다는 것. 팩트의 문제로만 이 사건을 대하는 감각이 정말 제대로 대하는 것인가.
여기에 현장의 제약이 맞붙었다. 마음에 여유가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지만 이것은 해고가 걸린 문제이고, 교회의 아이들에게 잘못된 지식이 전달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자리가 따로 있다.
남은 것
구약의 야훼와 신약의 예수를 하나의 신앙으로 묶는 일. 이것이 개인적으로는 실패이고 이것을 하나로 묶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소견이 나왔다. 신학적으로는 답이 없고 문학적으로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 두 신이 공존해도 되는 유일한 이유가 문학성이라는 말로 남았다. 다음 모임으로 넘겼다.
다양성이 선택적이라는 문제. 소수자는 어렵지 않게 들어올 수 있지만 보수주의자는 유입되지 않을 것이다. 다 모을 수 없기에 보수가 배제될 가능성이 높은데, 조금 더 유쾌하고 유연해지면 정착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더 머물다 갈 수는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으로 열려 있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개인의 행복이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논의를 끌어와, 집단주의 문화 안에서 개인주의적 사고를 하면 그 자체로 에러 상황이 발생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사회와 기업은 빠르게 변하는데 교회는 느리다.
떠난 자리에서도 놓지 못하는 것. 20년 가까이 교회를 떠나 있으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이 있고,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죄책감이 컸다는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자기 생각에 이름이 붙고 여럿이 공유한다는 것을 상상도 못 해봤기에 놀랐고, 조금 자유로워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