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트 어만 인터뷰 읽기 (1)(2)
읽은 글
2026년 4월 2일 공개된 바트 어만의 팟캐스트 인터뷰 전문. 부활절을 앞두고 기획된 자리였고, 진행자는 신앙 쪽에 서 있으면서도 젠틀하고 예리하게 질문을 끌고 가는 편이었다. 분량이 많아 두 주에 걸쳐 읽었다.
어만은 무디 성경학교에서 시작해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브루스 메츠거 아래 사본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는 본문 비평 연구자다. 근본주의에서 복음주의를 거쳐 자유주의 신학으로, 다시 탈종교로 옮겨온 이력을 스스로 여러 차례 정리해 발표한 바 있다. 결정적인 자리는 고통의 문제였다. 자신을 굳이 규정한다면 "기독교 무신론"이라는 말을 쓰지만, 최근 인터뷰에서는 신이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며 다만 구름 위에서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인격신은 거부한다는 쪽으로 말한다.
인터뷰는 예수를 도덕적 전환점으로 보는 그의 최근 저작 이야기로 시작해, 예수 실존 부정론자들과의 논쟁을 지나, 마지막에 부활 문제로 닫힌다.
이날의 질문
부활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인터뷰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었고, 모임도 그 물음으로 두 주를 썼다. 어만은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도 기독교 서사의 가치를 변증한다. 진행자는 죽음으로 끝난 이야기에 그만한 힘이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그 사이에서 참석자들의 자리가 갈렸고, 부활이 코어인가 아닌가로 거의 반반이 되었다.
쟁점 하나 — 예수가 이타의 기원인가
어만의 주장은 예수가 사랑이나 이타주의를 처음 말했다는 것이 아니다. 어느 집단에나 윤리적 감정은 있다. 다만 자기 집단 — 민족이든 지역이든 젠더든 — 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인간이라는 열린 지평으로 나아간 것이 예수의 분기점이라는 것. 유럽 문명이 그 위에 세워졌다는 논지다.
동의와 유보가 함께 나왔다. 보편화가 예수 사상의 특징이라는 데는 대체로 동의가 모였다. 유럽의 경우 그것이 예수에게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도.
다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윤리가 예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문장에는 반론이 붙었다. 공자도 부처도 그런 말을 했다. 그리스도교 전통 위에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생각이고, 서구 문명에 한정할 때만 성립한다.
더 날카로운 유보는 뒤쪽 사례에 대한 것이었다. 공공병원과 고아원이 그리스도교 윤리에 토대를 뒀다는 대목. 약자를 별도로 수용하는 시설은 복지의 개념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사회의 주류 공간에서 배제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그것이 반드시 도덕적 실천이었는지, 사회를 편의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필요에 따른 대답이었는지는 따로 물어야 한다. 도덕 의식이라는 하나의 축으로 너무 평면적으로 설명하려는 면이 있다는 것.
동아시아에서 읽으면 더 그렇다는 말이 이어졌다. 여러 문명권이 겹쳐 있는 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을 예수로 꿰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키워드 하나를 잡아 역사를 관통시키는 대중 역사서의 문법이 겹쳐 보인다는 지적이었다.
쟁점 둘 — 선한 사마리아인이 정점인가
약하다는 쪽. 이타의 정점은 오히려 빌립보서의 자기 비움이다. 죽기까지 복종했다는 서술에서 세상을 뒤집을 만한 에너지가 나온다. 사마리아인은 죽기까지 도운 것이 아니다. 치료비를 주고 돌본 것이고, 레위인과 제사장이 워낙 아무것도 안 해서 상대적으로 부각된 면이 있다. 이 비유에 그만한 무게를 싣는 것은 확대해석이다.
바로 그래서 좋다는 쪽. 죽기까지 하라고 하면 아무도 하지 않는다. 가진 것 중 얼마를 떼어 위기를 넘기게 해주는 정도는 노력하면 할 수 있다. 그 정도의 태도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으로도 세상은 바뀔 수 있다. 기준을 성화나 자기희생 쪽으로 너무 높이 세우면 기독교 서사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담만 주게 된다.
본문 자체로 읽자는 쪽. 율법 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예수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되묻는다. 질문의 방향이 뒤집힌다. 이웃의 범위를 확정해 달라는 요구를, 네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이냐는 물음으로 바꾼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라는 읽기다.
알레고리로 읽어보자는 제안도 나왔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제사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니, 이 비유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충돌을 그리는 구도일 수 있다는 것. 앞 문맥이 두 계명을 다루고 있어 얼추 들어맞는다. 다만 대결 구도가 지나치게 선명해진다는 자기 유보가 함께 붙었다.
쟁점 셋 — 예수에게 실적을 물을 수 있는가
어만식으로 끝까지 밀고 가면 이런 물음이 남는다. 종교적 상상을 빼고 볼 때, 예수가 실제로 도운 사람의 양은 얼마인가. 십자가 죽음을 빼면 현실적 도움이 얼마나 되는가. 오래 헌신하고 후원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데, 그에 견줄 분기점이 될 만한 것인가.
범주 오류라는 답이 나왔다. 예수가 하려던 것은 그것과 다른 과업이었다. 로마 아래에서 좌절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들이 섬겨온 하나님의 신실함이 이 시대에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가르친 사람이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칼을 드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나눌 때 창출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다. 복지적 실천을 얼마나 했느냐고 묻는 것은 초등학교 교사에게 영어를 몇 시간 가르쳤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도덕이라는 틀 자체가 시대착오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당시에는 도덕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성립하지 않았다. 예수는 자기가 속한 종교 전통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해석해 간 사람이지, 도덕 규범의 타당성을 검토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 이야기의 주제어는 이타가 아니라 환대라는 정리가 나왔다. 근대인처럼 고립된 개인들이 각자 이기적으로 굴 것이냐 이타적으로 굴 것이냐를 고르는 구도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로 묶여 있고 나는 공동체에 의존해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서, 서로를 환대하고 돌보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라는 것.
쟁점 넷 — 부활이 코어인가
인터뷰의 마지막 대목이자 이날의 중심이다. 진행자는 죽음으로 끝난 이야기에 힘이 있겠느냐 묻고, 어만은 부활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답한다. 다만 자신은 믿지 않는다.
부활이 없어도 된다는 쪽. 부활 이전에 예수의 가르침 자체만으로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유의미한 방향을 준다.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에 관한 종교적 차원의 가르침으로도 충분하다. 죽음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옹호하는 변증이 된다.
부활이 코어라는 쪽. 부활이 인정되지 않으면 기독교에 대한 매력을 거의 잃을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다른 데서도 다 있는 것들인데 굳이 기독교로 그것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동아시아 사람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 사역을 그만두고도 기독교에 남아 있게 된 것은 여전히 부활에 대한 이끌림이 있어서라는 증언이었다.
희망 자본이라는 말로 정리한 쪽. 부활이 없어도 괜찮은 사람은 굳이 믿지 않아도 되고, 희망 자본이 약한 사람에게는 이 이야기가 필요하다. 다만 위력의 기준을 너무 높게 잡을 필요는 없다. 현실을 바꾸는 힘은 거의 없고, 가벼운 사망보험 정도다. 없는 것은 아니되 대단한 것도 아니고, 기독교에 계속 흥미를 갖게 하고 사별을 마주할 때 그 슬픔을 앞에 놓을 수 있게 하는 정도의 힘이라는 것.
모든 것을 부활로 몰고 가고 싶다는 고백도 나왔다. 바울이 그렇게 논지를 폈고, 믿지 않는 어만조차 부활을 코어로 지적했다. 다들 이 구덩이에 빠뜨려 여기서부터 시작하자고 하고 싶은 뜨거움이 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 스스로 그 욕구에 폭력성이 있다고 이름 붙였다.
한편 부활을 믿는다면서도 위력을 못 느낀다는 물음이 따로 제기됐다. 성경을 읽고 기도한 지 25년인데 여전히 변화가 없다.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고 겉옷까지 내주라는 윤리를 지킬 능력이 없다. 부활은 했는데 왜 위력이 없는가, 2천 년이 지나도록 왜 오지 않는가.
쟁점 다섯 — 부활은 무엇을 뜻했는가
둘째 주는 여기에 대부분을 썼다. 역사적 사실 여부보다 그 담론이 어디서 왔는가로 물음을 옮긴 것이 이날의 방향이었다.
구약에는 원래 내세 사상이 없다. 기원전 2세기 묵시 사상과 함께 부활이 일부에게 받아들여졌고, 개신교 성서에는 없고 가톨릭 성서에 있는 마카베오서에서 처음으로 죽은 뒤 육체를 다시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배경은 박해다. 예루살렘 멸망은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은 그렇게 설명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로움을 지키기 위해 생성된 담론이라는 것.
그것이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사두개파는 믿지 않고 바리새파는 믿는 상태가 되었다. 바리새파의 부활 신앙에는 종말론이 함께 들어 있다. 메시아가 오면 모든 죽은 자의 육체가 부활하고 최후의 심판이 일어난다. 바울은 스스로 바리새 중의 바리새라고 말한 사람이다. 유대교 쪽이 역사의 끝에서 모두가 한꺼번에 부활하는 그림이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예수라는 개인이 역사의 한가운데서 홀로 부활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바울의 구도가 나온다.
그러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을 들은 당대 사람들은 무엇을 들었는가. 최소한 둘이 함께 있었을 것이라는 정리가 나왔다. 하나는 예수가 의인이라는 것 —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라는 구절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를 일으킴으로써 의인임을 확인했다는 주장. 다른 하나는 억울하게 죽은 의로운 사람들을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진다는 신실함에 대한 고백. 여기에 종말의 개시와, 의인의 피로 다른 이들의 죄가 씻긴다는 대속 담론까지 붙는다.
제2성전기 분파가 사두개·바리새·제사장 셋만은 아니었고, 부활 신앙에는 에녹 계열의 영향이 더 컸을 수 있다는 보충이 이어졌다. 지금 기독교가 믿는 형태의 세계관에 더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것이 오히려 그쪽일 수 있다는 것.
쟁점 여섯 — 사건과 의미를 분리할 수 있는가
여기가 가장 선명하게 갈렸다.
분리하는 쪽. 부활 신앙에서 자신이 붙드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메시지다. 예수는 의인이었다는 것, 하나님은 고통 속의 인간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것. 역사적 사건 자체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검증 불가능하고, 메시지의 핵심과는 비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판단을 물으면 알 수 없다고 답해야 한다.
분리할 수 없는 쪽.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담고 있는 의미 때문에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믿는 것이다. 그런데 사건과 의미가 분리되는 순간 의미가 파괴된다고 느낀다. 의미만 추출해 지니면서도 대단히 신실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목격하기에 그 자리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 감각이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
여기에 씨줄과 날줄이라는 틀이 제안됐다. 성서에는 근본 정신이 있고, 그 정신을 그 시대의 문화적 코드로 표현한 층이 있다. 다른 시대를 사는 우리는 문화적 코드를 걷어내고 핵심 정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문제는 부활에서 어디까지가 씨줄이고 어디부터가 날줄이냐다. 부활 개념 자체가 유대교 안에서 전승된 것이라면 그것도 문화적 코드인가. 덕지덕지 붙은 대속론과 종말론까지 코드라면, 그것들을 관통하는 정신은 무엇인가.
잠정적인 답은 이것이었다. 부활 신앙이 표현하려는 것은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며, 지금 세상이 고난으로 차 있어도 결국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하리라는 신념이다. 일반적인 도덕만으로는 그런 희망을 유지하기 어렵다. 나 개인은 도덕적으로 살 수 있지만 그래서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신념까지 같이 가져가기에는 악이 너무 많다.
쟁점 일곱 — 영의 부활이라는 말
인터뷰에 나온 이 표현을 두고 따로 시간을 썼다.
성서의 부활 증언은 섞여 있다. 함께 식사하는 부활이 있고, 바울이 본 것처럼 환상으로 주어진 것도 있고, 벽을 통과하기도 한다. 영적 부활이냐 육적 부활이냐로 딱 갈라 담기 어렵다는 것. 다만 어만은 1세기 유대권에서는 육체적 부활이 메인이었다고 보고, 그래서 부활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육체적인 것이되 자신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비전이라는 언어가 어느 쪽으로도 쓰인다는 정리가 나왔다. 부정하는 쪽에서는 제자들이 상실의 고통 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으로 설명한다. 긍정하는 쪽에서는 초월적 사건이 물리 세계에 전달되는 방식이 비전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뒤 신앙 공동체가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거나 함께 걸었다는 고백으로 발전했으리라는 것.
여기에 중간항을 제시하는 답도 있었다. 기존의 물리적인 것도 아니고 육이 없는 영적인 것도 아닌, 새로운 방식의 물질성일 것이라는 정도. 그렇게 두어야 각기 다른 공동체가 남긴 다양한 고백들이 납득되는 폼이 된다는 것.
깊이 파는 것이 늘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 여기 붙었다. 정합적으로 설명해내는 일이 만족스러워 보이지만, 그런 설명에는 감정이 없다. 하나도 기쁘지 않다. 짜임새를 맞춰놓고 나면 피곤하다. 부활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본질을 놓치면서 설명만 남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었다.
곁가지 — 왜 하필 갈릴리와 사마리아인가
경계를 넘을 수 있었던 이유가 예수가 갈릴리 촌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유대 환경에서 교육받았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갈릴리는 그 무렵 이미 오래 헬라화된 지역이었고,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말이 성서에 남아 있다. 주류에서 비켜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보편적 가치를 주목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
예수 운동과 사마리아의 친연성도 함께 짚였다. 선한 자로 명시된 것이 사마리아 사람이고, 우물가에서 대화한 것도 사마리아이며, 보통은 사마리아를 피해 돌아가는데 예수는 굳이 통과한다. 제자들이 처음 복음을 선포한 곳도 사마리아로 나온다.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공통점은 촌이고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 — 그래서 그들의 생각이 혁신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되기 쉬웠다는 가설이다.
곁가지 — 내수용에서 해외용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의 랍비나 예언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관점이 나왔다. 이웃의 범주가 넓어진 이유가 가르침이 파격적이어서가 아니라, 유대 안에서 쓰이던 것이 스페인까지 가는 버전으로 확장되면서 규칙이 개편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 원수의 범주가 사라지고 원수도 이웃이 될 수 있는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표현된 것이라면, 예수의 가르침은 불연속적 복음이 아니라 정결과 부정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나온 결과물로 읽을 수도 있다.
곁가지 — 착하지 않을 권리
부활을 전제로 애써 착하게 살아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몸의 부활이 있다고 믿었기에 이 생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오래 생각해 왔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별로 없었다는 것. 그런데 인터뷰를 읽으며 상당히 설득당한 상태가 되었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애쓴 것이 억울하다는 감각과 앞으로 무엇을 동기로 살아야 하느냐는 혼란이 함께 왔다고 했다.
이에 대해 착하지 않을 권리와 자유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한 문제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릴 때부터 거룩한 성전이라는 말로 자라면서 빡칠 기회 자체를 상실한 것 아니냐는 것.
곁가지 — 천국과 지옥의 시점
부활을 믿는다면 그 뒤에 따라오는 심판과 지옥은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이 나왔다.
성서 안에서도 어긋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죽은 자들이 잠자다가 마지막에 일어나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데,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는 죽는 즉시 각자의 자리로 간다. 편지가 두 통인데 내용이 서로 다르니 자녀들끼리 어느 쪽이 맞느냐로 다투는 형국이라는 것.
가톨릭 쪽의 체계가 대조로 소개됐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사심판을 받아 천국·연옥·지옥으로 나뉘어 안식하다가, 종말에 새로운 몸을 받아 영혼과 육체가 다시 결합하며 한꺼번에 부활한다. 부활 신앙이란 예수가 부활했다는 명제가 아니라 우리가 언제 어떻게 부활하는가에 관한 하나의 체계라는 것.
개신교 쪽에서는 이 시점 문제가 정리되어 있지 않고 지옥 이야기만 남았다는 자기 진단이 이어졌다. 청소년 사역 현장에서 지옥 간증 영상을 어린 나이부터 보여주고, 그 콘텐츠가 워낙 강해 성서의 다른 상상 가능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 아동 교육 차원에서 개신교의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남은 것
확률의 언어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부활을 실체적 사건으로 일어났을 확률이 높다고 보는 쪽에 서 있더라도, 그것은 확률의 언어다. 그런데 강단의 언어와 찬송의 언어는 확신의 언어로 되어 있다. 내적 정합성이 맞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일 자체가 어려워진다. 확률의 언어 안에서도 매주 모이고 무언가 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려는 것이 지금의 과제이고, 생각보다 고민할 것이 많다는 데서 멈췄다. 기도의 의미, 전례의 의미가 여기에 다 걸려 있다.
종교성은 무엇인가. 기독교 인구 비율이 높은 나라가 더 윤리적인가를 검증한 연구에서는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보고가 소개됐다. 다만 종교와 사회적 공동체가 결합하면 그 공동체는 유의미하게 오래 유지된다. 좋은 뜻으로 모인 공동체는 그렇지 않은데. 이 결과를 두고 종교는 인간 심리의 한 기능일 뿐이라고 읽는 쪽과, 종교가 인간에게 본질적이므로 신이 있는 것이라고 읽는 쪽이 다시 갈린다. 심리학은 어느 쪽인지 알려주지 않고 길만 알려준다는 정리로 남았다.
희망으로서의 부활과 그 부작용. 이 땅이 아니라 앞으로 올 세상에 승리가 있다는 구도는 견디게 하는 힘이 되지만, 현실을 내려놓게 만드는 반대극이 함께 있다. 희망 자본을 가지고 다시 땅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자꾸 저 너머로 정신이 팔리게 만드는 것. 다음 회차로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