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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4. 22. (게시 2026. 5. 18.)

'신'도 과학의 영역이다(리차드 도킨스) vs '신'은 종교/형이상학의 영역이다(로완 윌리엄스)

리처드 도킨스 vs 로완 윌리엄스

읽은 글

리처드 도킨스와 로완 윌리엄스의 토론(2026년 2월 10일). 진화생물학자와 성공회 신학자가 시를 매개로 신 문제를 다룬다.

윌리엄스는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아담과 하와를 문자적으로 읽지 않으면서, 그 안에 담긴 종교적 가치와 풍성함을 말한다. 제도권 교회에서 만날 법한 온건하고 학식 있는 어른의 자리다.

도킨스는 신 문제까지 과학의 범주로 가져온다. 신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과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일 텐데, 없으니 이런 대화는 시간 낭비에 가깝다는 태도다. 자연 자체의 생성력과 창발적 속성만으로 이미 충분히 경이로운데 왜 자꾸 신적 요소를 끌어들이느냐고 되묻는다.

두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며 대화한다는 점은 이날 여러 번 언급됐다. 싸우는 자리가 아니라 훈훈한 자리였다는 것.

이날의 질문

로완 윌리엄스는 무엇을 변호하고 있는가.

이날 소감은 대체로 아쉬움이었고, 그 아쉬움이 어디서 오는지를 파고들다 보니 이 물음이 남았다. 그가 변호하는 신은 성서가 증언하는 신인가, 철학자들의 신인가. 그리고 공공의 장에서 그 둘은 갈릴 수밖에 없는가.

쟁점 하나 — 차라리 정직하게 졌으면

가장 먼저 나온 소감이 가장 아팠다. 윌리엄스를 응원하며 읽었고 더 잘 싸워주기를 바랐는데, 문학적 상상력으로 비켜가고 피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는 것. 차라리 정직하게 지거나, 차라리 말을 못 하고 머뭇거렸으면 좋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이 대담을 읽으면 「이 사람 뭐야」가 될 것 같고, 팔이 안으로 굽는 마음으로 읽어도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

그런데 이 아쉬움이 자기 검증으로 이어졌다. 상황을 임기응변으로 비켜가면서도 지지 않는 화법 — 그 화법에 자신도 익숙하고 그래서 오히려 자기 비판을 하게 된다는 고백이 붙었다. 신뢰 관계가 없는 자리에서 이 언어가 얼마나 기만적으로 들릴 수 있는지를 계속 확인하게 되더라는 것.

반론도 함께 나왔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층위가 우리 삶에 분명히 있다. 문제는 도킨스가 바로 그 지점에서 벽처럼 막혀 있다는 것.

쟁점 둘 — 칸트의 구도 그대로다

이날 가장 깔끔한 관찰이 여기서 나왔다.

칸트의 세 비판서는 이렇게 놓인다. 『순수이성비판』은 자연과학을 수행하는 이성에 관한 것이고, 『실천이성비판』은 도덕과 종교에 관한 것이다. 칸트 자신이 이 둘의 괴리를 느껴서 『판단력비판』에서 미적 체험을 매개로 놓았다. 미적 체험은 과학하는 이성과도 이어지고 종교·도덕과도 이어진다.

과학자와 신학자가 시를 놓고 대화하는 지금 이 구도가 칸트가 말한 그대로라는 것.

쟁점 셋 — 각자 어떤 신을 상대하는가

무신론은 언제나 특정한 유형의 유신론에 대한 안티다. 신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고, 어떤 종류의 신 이해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킨스가 반대하는 것은 문자주의적으로 이해된 신이다. 그리고 윌리엄스가 변호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신, 철학자들의 신이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하나님과는 다른 계열일 수 있다.

그래서 이 대화가 우리와 상관없어 보인다는 거부감이 처음에 있었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문자주의의 신과 철학자의 신이 서로 대화하는 자리 아닌가. 다만 윌리엄스의 어느 대목에서는 성서적 하나님의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 조금 더 공감하며 읽게 됐다는 것.

괴리가 너무 멀다는 지적도 나왔다. 윌리엄스가 말하는 우주 설명은 구약의 하나님도 신약의 하나님도 아니다. 현대적인 것을 많이 수용하면서 비판을 비켜 나갈 상상력의 층을 계속 쌓아 올린 결과인데, 성서와의 중간 다리가 너무 없지 않은가. 여기까지 오면 기독교라는 라벨이 붙어야 하는지도 물어야 한다는 데까지 갔다.

쟁점 넷 — 성서는 안 썼는데 교부는 왜

이 대목에서 판단이 갈렸다.

성서를 인용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는 데는 대체로 동의가 모였다. 자기 경전이 통하지 않는 공간에 나가 구절을 읊는 것은 매너가 아니다. 궁금해하는 사람에게 소개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교부는 왜 넣느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교회 안에서라면 맞지만, 눈앞의 과학자를 설득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튜브 구독자를 위한 말이라면 모를까 대화의 공통 언어를 잡는 데 노력을 더 썼으면 좋았겠다는 것.

변호도 있었다. 그 대목은 도킨스의 말을 반박하려는 맥락이었다 — 아우구스티누스가 형성한 원죄론 이전의 기독교는 그렇지 않았으니 그 지점을 공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취지. 흔한 기독교 변증으로 흐르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다 보니 말투가 그렇게 흘러간 면이 있다는 읽기다.

쟁점 다섯 — 도킨스의 불성실함

도킨스도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 대화는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사이의 대화인데, 도킨스는 눈에 보이는 것만 놓고 이야기하자고 한다. 그러면 대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초자연적인 것을 왜 고려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자연만으로 완벽하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것은 충분한 설명이 아니다. 「그것이 내가 보는 제1후보다」 정도는 말할 수 있어도, 그것이 곧 맞다는 말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태도가 윌리엄스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데까지 갔다. 「내가 맞는데 왜 그러느냐」는 태도를 양쪽이 공유한다. 한쪽은 계속 「진화의 부산물이잖아」라고 하고 다른 쪽은 계속 「그래도 뭔가 있지 않겠어」라고 한다. 논증이 쌓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 구축해 온 당연함을 주고받는 자리였다는 것.

한 대목이 인상적인 예로 놓였다. 윌리엄스가 「하나님이 매일 경계를 허물고 밖으로 나가는 에너지로 우주를 지탱하신다」고 말한다. 그 「경계를 허물고 나간다」는 표현이 감동적으로 읽혔는데, 몇 줄 아래에서 도킨스가 자기에게는 불필요한 이야기로 들린다고 잘라버린다. 가장 핵심적인 대목에서 코드가 안 맞는 것.

쟁점 여섯 — 사실의 언어와 진실의 언어

도킨스가 「과학으로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라고 할 때 벽이 느껴지는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다.

사실의 언어가 있다.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 같은 것, 수학 방정식이 다루는 것. 진실의 언어는 다르다. 아침에 부부싸움을 하고 지긋지긋하다며 나갔다가 밤에 장미꽃을 사 들고 「여보 사랑해」 하는 언어. 앞뒤가 안 맞지만 삶의 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부모가 돌아가셔서 슬퍼 죽겠는데 배가 고파 밥을 먹는다. 울면서 밥을 먹으며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는 내가 밉다」고 말한다. 그 역설이 우리 삶의 진실인데, 과학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에너지의 비유가 이어졌다. 밥을 먹고 에너지를 낸다는 것은 과학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같은 밥을 먹어도 그 에너지가 어디로 쓰이느냐에 따라 질이 전혀 다르다. 단백질 몇 그램에 몇 칼로리로 설명하는 것이 설명인가.

그래서 이런 정리가 나왔다. 과학은 자기가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을 설명하면 된다. 그 바깥의 층위는 그 자체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고,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드는 과정에 하나님이 불릴 수도 있고 하나님 없는 종교가 추구될 수도 있다. 그런 영역이 있다는 것을 도킨스가 인정해 주면 좋겠다는 것.

⚠ 여기에 용어 수정이 붙었다. 그것을 초자연적이라고 대비시키기보다, 과학이 포착하는 자연과 우리 삶의 본질적인 자연 사이에 층위가 다르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는 것.

쟁점 일곱 —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토론 후반에 윌리엄스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다. 자기 자리를 세우기 어렵다, 도킨스의 말이 무슨 말인지는 충분히 알겠는데 그것이 나를 설득하지는 못한다, 나는 여전히 신을 믿는데 왜 믿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힘이 없는 이유가 드러나는 장면이라는 읽기. 여기까지 오면 사실 이분이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논쟁에 힘이 실리지 않았던 까닭이 이 대목에서 확인된다는 것.

가장 애정이 가는 대목이라는 읽기. 이 부분만이 순도가 높다. 돌려 말하지 않고 레토릭을 가장 덜 쓴 자리다. 무책임한데, 무책임하다는 사실이 정직하다.

여기에 연애 이야기가 붙었다. 가족들이 「뭐가 좋냐」고 물었을 때 나도 모르겠더라는 것. 내가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에 비하면 「이러이러해서 좋습니다」는 너무 빈곤한 말이다. 왜 믿느냐도 마땅한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느냐는 것.

다만 유보가 붙었다. 개인의 고백으로는 아름답지만 대화 담론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 자리다. 모드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쟁점 여덟 — 심리학에서 보는 종교

이날 가장 긴 설명이 여기 놓였다.

인간의 강한 메타인지가 출발점이다. 추상적 사고 능력은 다른 동물에게도 있지만 인간의 레벨은 차원이 다르다. 낮은 포유류도 미로 전체를 머릿속에 떠올려 길을 찾는다. 그런데 인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만들어 그 개념 안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국가도 종교도 여기서 나온다.

개념을 만들면 그때부터 작동한다. 그것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와 무관하게, 언어로 만들어 놓으면 작동하는 무엇이 되어버린다. 그것이 인간의 정신 세계다.

그래서 종교는 진화의 부산물일 수 있다. 진화란 필요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다 살아남은 것들의 결과인데, 인간은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넓은 정신 세계를 갖게 됐다. 그러다 보니 정신적 고통도 다른 동물보다 훨씬 크고, 그것을 안정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윤리적이면서 인격적인 대상이 있으면 대단히 수월해진다.

「영적 존재」의 번역도 여기서 나왔다. 인간만이 영적 존재라는 말은, 심리학적으로 보면 인간만이 차원이 다른 메타인지를 가진 존재라는 뜻으로 잘 해석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공유하고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인지 능력에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이 부활 문제로 이어졌다. 데카르트가 영혼이 따로 있다고 느꼈던 그 감각 자체가 강한 메타인지의 산물이고, 그것이 손상되면 그런 경험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원론은 과학계에서 부정된 상태다. 그렇다면 영혼만의 부활을 말할 때 이 설명을 전부 다시 갈아엎어야 한다. 그런 곤란에 빠지지 않으려면 부활을 믿을 거면 몸의 부활 쪽이 오류의 개수를 줄인다는 것.

쟁점 아홉 — 과몰입과 모드 체인지

메타인지의 다른 용법이 여기서 나왔다.

과학으로 모든 것을 환원하려 할 때 사랑이나 의미처럼 그렇게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과학자가 메타인지가 높은 과학자다. 도킨스는 세계 최고 수준의 생물학자지만 과학 과몰입일 수 있다.

그런데 종교도 똑같다. 이것이 공기 입자의 충돌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거기서 신성한 빛을 볼 수 있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면서 내가 여기서 기뻐할 수 있는 것 — 모드를 바꿔가며 둘 다 풍성하게 즐길 수 있을 때 메타인지가 높은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종교 과몰입이 된다.

그래서 서로 한 발씩 양보해 잠깐 자기 모드를 내려놓고 보면 대화가 더 재미있어지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과학을 발전시키려면 과학 과몰입이 필요하고 종교를 발전시키려면 종교 과몰입이 필요한데, 소통할 때는 잠깐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쟁점 열 — 기능하면 진리인가

윌리엄 제임스의 기능주의가 소개됐다. 기능하면 진리다 —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관점.

그것이 필요해서 만들어졌으니 진짜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기능했으면 됐고, 진짜인지 아닌지는 개인의 감각에 맡겨도 되는 것이지 반드시 증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태도다. 부활도 영혼 멸절설도, 나에게 이런 식으로 의미가 생기면 그것이 우선이고 논증은 그다음이라는 것.

상담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보면 기독교 신앙은 기능 면에서 거의 최강이라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붙었다. 다만 부정적으로 작동하는 것들은 없애야 한다는 단서와 함께.

곁가지 — 바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

한 수녀 이야기가 나왔다. 아침에 새 우는 소리를 듣고 오늘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고 오는 분. 성서학 박사로 학문적 훈련이 깊은데도 그렇다.

부러움과 유보가 함께 왔다. 나도 인간이고 메타인지가 있을 텐데 나에게는 그런 영적 감각이 없다는 반성이 하나. 그리고 그런 발산이 그분 안의 창조적 신성처럼 보인다는 감탄이 하나.

다만 이것을 누구에게 말하면 시험 들 것 같다는 유보가 붙었다. 왜 나에게는 이런 은혜가 없나 하는 혼란이 올 수 있으니, 그렇게 고백되면 안 되는 자리가 있다는 것.

곁가지 — 방언이어도 좋겠다

도킨스가 윌리엄스를 조롱하듯 「방언과 같습니다」라고 한 대목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역으로 답 같다는 말이 나왔다. 누군가 들음직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다듬어져야 하지만, 한 개인으로서 발산하는 모습이 방언 같아도 좋겠다는 것. 도킨스가 진영 밖에서 정답을 던져준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는 말이었다.

남은 것

도킨스를 만난다면 무엇을 말할 것인가. 이날의 실질적 결론이 여기 놓였다.

먼저 자연과학의 성과를 그대로 전제로 가져온다. 우주 138억 년과 지구 46억 년을 볼 때, 인격 언어의 상상력을 잠깐 빌린다면 이 창조자는 인내심이 많고, 실험을 많이 하고, 스케일이 크고, 실패도 잦은 편이다. 멸종이 그렇게 많았으니까.

그리고 도킨스가 자연에서 위대한 경이로움과 엄청난 추악함 두 가지를 함께 보는 것이 과학적으로 맞다고 인정한다. 무시무시한 냉혹함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같이 있는 것.

핵심은 그다음이다. 기독교 전통의 아이디어를 융합해서 어떤 결론을 낼 때 그것이 어떤 생산성과 가치가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 그래야 도킨스에게 「지구에서 우리가 같이 공존해도 위험하지 않은 종일 수 있겠구나」가 전달된다. 도킨스를 설득하거나 교회로 부르자는 것이 아니라, 도킨스 곁의 친구가 교회를 다녀도 도킨스가 열받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것.

도킨스가 화날 만한 정황이 있다는 이해도 함께 놓였다. 공룡이 방주에 탔다는 식으로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없는 내용이 유포되는 공간이 되어버렸으니, 과학자로서 그 비율을 줄이는 것이 인류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역사비평이 문자주의를 교정하듯, 도킨스의 관점도 자연과학적 사실을 신학적으로 무리하게 해석하려는 시도를 차단하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는 인정이었다.

세 단계. 종교적 에너지가 살아나려면 순서가 있다는 정리로 닫혔다. 먼저 나에게 작동해야 하고, 그다음 공통 언어가 만들어져 커뮤니티가 되어야 하고, 그것이 다시 다른 학문의 날카로운 검에 찔려 보면서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

다음 회차는 뇌신경과학자와 우주생물학자의 토론 — 의식과 신 개념을 다루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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