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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5. 20. (게시 2026. 6. 19.)

폴 데이비스 · 에밀리 케시 허스트 — 우주에는 어떤 목적(신, X)의 흔적이 있을까

폴 데이비스 vs 에밀리 케이스 허스트

읽은 글

폴 데이비스와 에밀리 케이스 허스트의 토론 — 우주에 목적이 있는가, 양자의 기묘함이 신을 가리키는가.

폴 데이비스는 이론물리학자이자 우주론자, 우주생물학자다. 애리조나 주립대의 비욘드 센터 소장으로 국내에 번역된 책이 여럿 있다. 스스로를 종교적이라거나 기독교적이라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와 대화하는 책을 쓴다.

에밀리 케이스 허스트는 종교철학자이자 신학자인데 스스로를 무신론 신학자라고 부른다. 도킨스의 영향을 받은 신무신론자였다가 신학을 들여다보게 됐고, 신은 없다고 판단하되 섬세하고 깊은 신학은 매력 있다고 본다. 신과 물리학에 관한 책을 계속 쓰는 무신론자다.

폴 데이비스의 X

우주의 진화 과정과 소립자 세계의 시스템을 볼 때 이것이 너무 놀라운 구조라는 데서 출발한다. 계획이나 의도 같은 인격적 언어는 피하되, 어떤 방향성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우주 바깥의 할아버지 신이라는 고정관념을 걷어내기 위해 그 지향점을 X라고 부른다.

여기에 양자역학이 얹힌다. 관측 이전에는 확률로만 있던 전자가 포착될 때 위치를 갖는다는 데서 참여적 우주 개념이 나오고, 뒤에 가면 역인과성과 힐베르트 공간 이야기까지 간다. 수학이 자연을 이렇게까지 잘 기술한다는 사실 — 수학의 비합리적 유효성 — 이 그의 핵심 근거다.

에밀리 케이스 허스트의 반대

틈새의 신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 일관된 입장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을 X로든 신으로든 메우는 방식에 전부 반대한다. 물리 시스템에서 나오는 창발로 설명하면 된다.

다만 그가 매력적이라고 지지하는 신학이 있다. 깊은 성육신다중 성육신이다. 고전적 성육신이 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림이라면, 깊은 성육신은 예수 안에서 신성이 깊이 체현된 사건을 우주 전체로 확장해 읽는다 — 닐스 그레게르센 계열이다. 다중 성육신은 외계의 지적 문명이 있다면 각 행성마다 메시아적 존재가 있었으리라는 상상이다. 자기는 무신론자지만 이런 철학은 우아하다고 말한다.

무신론에 이른 이유는 다른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다. 자신에게 종교적 체험이 없다는 것, 그리고 악의 문제. 이 두 데이터를 합쳤을 때 신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는 것.

이날의 질문

우주를 관찰할 때 화살표가 보이는가.

그리고 보인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틈새의 신이 되는가. 두 사람이 팽팽했고, 참석자들도 갈렸다.

준비하며 함께 정리한 것 — 과학의 합의 수준

비전문가가 과학을 신학적 상상과 공명시키려 할 때 가장 위험한 자리는 무엇이 합의된 것이고 무엇이 논쟁 중이며 무엇이 아예 과학의 물음이 아닌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으로 미끄러지는 지점이 대체로 여기다.

``` 합의 수준 높음 양자역학의 메커니즘 · 양자 얽힘 (반도체와 위치 추적이 이 위에서 돈다) 논쟁 중 다중우주론 · 양자 해석의 의미 · 거시와 미시의 연결 합의 불가 역인과성 · 참여적 우주 · X (실험으로 검증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

다중우주론도 거의 종교 수준이라는 관찰이 붙었다. 확률을 무한으로 늘려 지금 우주의 확률을 설명하는 방식이니, 그것과 X 사이에 원리적인 우열이 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쟁점 하나 — 어느 쪽에 끌리는가

소감이 진단 키트처럼 작동했다.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보다, 지금 내가 어느 쪽에 끌리고 있는지가 드러나더라는 것. 10년 뒤에 읽으면 다른 쪽으로 기울지도 모르겠다는 말이 따라붙었다.

에밀리 쪽.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한다. 인간이 진화의 산물임에도 고도의 수학을 이해한다는 것이 놀랍다거나, 의식이 우주의 실재를 구성하는 근본 역할을 한다거나, X라는 개념이 필요하다거나 — 폴 쪽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고 애매하다. 창발이라는 개념으로 깔끔하게 풀린다.

폴 쪽. 어릴 때부터 우주가 너무 신기했다는 쪽이다. 원자를 쪼개고 쪼개 들어간 세계의 규칙성이 우리 세계와 다르다는 것, 관측하지 않으면 무정형으로 떠돌다 볼 때 있는 것이 된다는 것. 이 정교한 시스템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과학적 물음이면서 동시에 철학적·종교적 물음으로 겹쳐 있었다는 증언이었다.

둘 다 필요하다는 쪽. 어느 쪽 주장도 더 설득력 있지 않은 긴장 상태로 가는 것이 건강하다. 그 태도들이 서로 존중받으며 있어야 그 사이에 자유가 생긴다는 것.

논술적 언어와 시적 언어의 대화 같다는 표현도 나왔다. 장르가 다른 두 화법이 서로를 존중하며 오간 자리라는 것.

쟁점 둘 — 이것은 틈새의 신인가

에밀리가 개념을 잘못 쓰고 있다는 지적이 먼저 나왔다. 틈새의 신이란 과학적 설명의 공백을 신으로 메우는 것이다. 그런데 폴이 하는 것은 과학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가설을 제시하는 것이다. 새로운 과학 이론이 등장한다고 논박될 성격이 아니다.

과학적 가설로 주장하는가가 갈림길이라는 정리가 이어졌다. 만약 폴이 이것을 과학적 가설로 내놓는다면 틈새의 신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 원리적으로 검증 가능한 방법을 제시해야 하니까. 그런데 대담을 보면 그러는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그렇게 들린다는 반론. 에밀리는 은연중에 폴이 틈새의 신을 주장한다고 계속 말하고 있고, 그 말이 타당하게 느껴진다. 폴은 그것을 방어하면서 자기는 정합성 있는 가능성을 제기할 뿐이라고 하는데, 그 말도 타당하게 느껴진다. 인격신을 완전히 빼더라도 이 팽팽함은 남는다는 것.

변호 쪽 정리.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데이터만 보자. 빅뱅에서 초신성으로, 탄소에서 세포로, 세포에서 의식으로 — 이 재료들과 현상들을 볼 때 화살표가 있느냐 없느냐. 그냥 우연이냐, 아니면 지향이 있느냐. 이론물리학자가 보기에 화살표가 보인다면, 거기까지만 말하고 X라고 괄호 쳐두는 것은 다중우주론과 마찬가지로 선택 가능한 옵션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라는 데 정리가 모였다. 과학이 여기까지 말했으니 이것이 곧 야훼가 한 일이라고 병합하는 순간, 그때 틈새의 신이 된다.

쟁점 셋 — 수학에서 목적으로 넘어가는 도약

우주가 수학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다들 신기해했다. 외계인을 만나면 당신들도 수학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데 거기서 목적으로 넘어가는 대목에 틈이 있다. 우주가 수학적으로 기술된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지 기계의 작동임을 뜻할 수도 있다. 논증 없이 쑥 넘어간 자리라는 지적이었다.

전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답이 이어졌다. 신이 수학자라는 상(像)이다. 갈릴레오가 말한 두 권의 책 — 자연이라는 책과 성경이라는 책이 있고 자연은 수학의 문법으로 쓰였다는 것 — 이 케플러 이래의 배경이다.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는 보충도 붙었다. 낸시 카트라이트 같은 철학자는 자연법칙의 필연성을 믿는 유물론자라면 그 필연성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경험론적 접근만으로는 사건들의 규칙성밖에 안 나오고, 법칙이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법칙 제정자가 필요하다는 것. 데카르트의 관점이기도 하다.

쟁점 넷 — 두 사람 모두 이신론적이다

이날 가장 날카로운 지적이 여기서 나왔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최고의 원리는 신이 아니라 인과율이다.

제일원인 논증을 요약하면 이렇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고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신에 이른다. 그런데 이 논증의 전제는 신보다 인과율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신이 인과의 연쇄 속에 자리 잡게 된다. 거북이 등 위에 세계가 얹혀 있다는 설화와 구조가 같다.

에밀리도 같은 자리에 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려면 왜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지 설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곧 고통과 악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소급시키는 것이다. 하나님도 원인을 갖고 대답해 줘야 하는 존재가 된다. 한 사람은 신을 인과율의 끝에 위치시키고, 다른 사람은 신을 인과율로 설명하라고 요구한다 — 근대 철학의 충족이유율을 두 방식으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

반론 — 그것은 정치적 선택이었다

인과율과 충족이유율을 도입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는 반론이 이어졌다.

합리적 원리에 따라 이해되지 않는 신은 자의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의지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자의적으로 휘두르는 신관이 지배적일 때, 그것은 엄청난 사회적·정치적 영향을 끼친다. 데카르트도 스피노자도 그것을 막으려 했다. 세계를 이해하려는 규칙성과 질서를 확보하기 위해 신도 그 원리 안에 놓은 것이다.

데카르트를 이신론으로 볼 수 없다는 지적도 붙었다. 이신론은 세계를 한 번 창조한 뒤 개입하지 않고 방치하는 관념인데, 데카르트는 세계를 보존하고 연속적으로 재창조하는 존재로서의 신을 말한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됐다. 결국 설명을 어디까지 소급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폴은 빅뱅 단계까지 인과율을 적용하려 하고, 유물론자들은 그 단계에서는 법칙도 초기 조건도 말할 수 없으니 적용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그 원칙 자체를 폐기하면 신학뿐 아니라 모든 자연학이 카오스로 빠진다.

쟁점 다섯 — 그물의 크기

에밀리가 쓴 비유가 이날 가장 많이 되돌아온 이미지였다. 구멍이 5cm인 그물로는 그보다 큰 물고기만 잡힌다.

그 비유를 되돌려주자는 쪽. 당신들이 가진 그물에 걸리는 것만 당신들은 본다. 오랫동안 전승된 신의 관념은 그 그물로 잡아낼 수 없는 것을 너무 많이 갖고 있는데, 그물 안에서만 사고하고 있는 것 아닌가.

여기에 환원주의 비판이 이어졌다. 사랑을 호르몬으로 설명하는 것이 그렇다. 여행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같은 연소 방정식으로 굴러가는 자동차를 타고 각자 다른 코스와 의미와 경험의 여행을 한다. 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연비와 비용과 이동 거리다. 그것이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여행을 규명하기에 부적절한 접근법이라는 것.

그물을 다르게 쓰자는 답. 그물의 크기를 조정해 신을 건져 올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물망의 레벨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그물이 흔들리는 정도를 포착하려는 것이다. 제일원인이나 필연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어울리는 것, 공명하는 것, 교차하는 지점을 찾고 싶다는 것.

그래서 이런 말로 정리됐다. 우주를 볼 때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크다고 볼 수도 있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섬세할 수 있나 볼 수도 있다.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신념과 무엇이 공명하는지를 보는 것.

쟁점 여섯 — 아예 별개인가

자연과학이 탐구하는 자연의 영역과 신과 인간의 관계 영역은 완전히 별개라는 입장이 제시됐다. 논의의 틀 자체를 따라가지 않는 제3의 자리다.

이에 대한 응답은 종교적 체험의 유무로 갈렸다. 체험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갈라도 되지만, 체험이 부족한 사람은 이런 경로로라도 채워보려 한다는 것.

옛사람들에게는 과학이 없었다는 관찰이 붙었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지평에서 편하게 신 체험을 서술할 수 있었다. 지금은 과학의 성과가 압도적인 시대를 살다 보니, 그 성과와 신이라는 주제를 어디까지 연결할 수 있는가라는 이전 인류가 하지 못한 고민을 안게 됐다는 것.

쟁점 일곱 — 신정론은 잘못된 질문인가

에밀리가 「세상의 고통과 악이 해명되어야 신의 존재에 설득될 수 있다」고 한 대목에 강한 반대가 나왔다.

신정론 자체가 신을 인과율에 종속시키는 물음이라는 것이 앞서의 지적이었다. 여기에 더해 이런 정리가 이어졌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유를 설명하는 신학이 아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낙원에서 추방되어 고통과 악이 있는 세계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다음 하나님이 보여주는 행동은 그 고통 속의 너희를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서가 증언하는 것은 어떻게 해방하시는가의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왜 고통을 만드셨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고통에서 우리를 어떻게 구해 주시는가, 우리는 그 일에 어떻게 참여하는가라는 것.

의사의 비유가 붙었다. 환자가 들어오면 증상을 보고 어떻게 고칠지를 판단해야 하는데, 「왜 다치셨어요」를 먼저 묻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 물어볼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교가 꼭 대답해야 하는 질문인가에는 회의가 있다는 유보였다.

곁가지 — 성서를 지금 다시 쓴다면

이날 가장 인상적인 상상이 여기서 나왔다.

성서를 리뉴얼한다면 이런 탄원시를 쓸 수 있다. 「하나님, 지금 저는 당신과 양자 얽힘의 관계로 공명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슬픔이 당신에게도 어떤 영향을 줄까요.」

천 년 뒤에는 이것이 고대인의 신앙고백으로 읽힐 것이다. 옛사람들이 바람을 가지고 신을 묘사했듯, 우리는 우리 시대의 교양으로 신앙고백과 공명하는 것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정교함을 이해하는 그 안에서 무엇이 가능한가의 문제다.

곁가지 — 교회 운영자의 고민

이 논의가 실제로 무엇에 걸려 있는지가 마지막에 정리됐다.

유사과학으로 종교를 하려는 풍토를 벗어나면 좋은 교양과학과 이야기할 거리가 많다. 의식의 문제, 생물학, 우주론. 그런데 그것을 알고 나면 곧바로 실무의 물음들이 따라온다.

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기도했더니 신이 개입해 병을 고쳤다고 하면 그것대로 우주 시스템에 트러블이 생긴다. 아예 안 하는 것과 옛날처럼 하는 것 사이에서, 아주 살짝만 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찾고 싶다는 것.

이어서 의식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주체적 행동이 어떻게 가능한지, 종교 의례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영성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성서 해석을 나눌 때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가 연쇄적으로 걸린다.

남은 것

제3의 개념 틀. 행위성이냐 메커니즘이냐의 충돌 안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으니 새로운 개념 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데 토론자 두 사람이 함께 동의했다. 그래서 이것이 참석자들에게 숙제로 넘어갔다 — 과학자의 눈, 건축가의 눈 말고 다른 장르에서 신을 설명하는 자기만의 표현을 각자 만들어 와 보자는 것.

X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폴은 화살표가 있다고만 말하고 그것이 어떤 방향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 화살표에 감성을 한 스푼 넣는 것 — 기독교라면 사랑을, 우정을 — 이 종교인이 하는 일이라는 정리가 나왔다. 다만 공룡의 멸종부터 지금의 인재 사건까지를 앞에 놓고도 그 한 스푼을 넣을 수 있느냐가 어려운 자리로 남았다. 뉴스만 보면 넣을 수 없고, 우주의 경이로움 쪽을 보면 넣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것.

방향성을 다르게 채울 수도 있다는 제안도 나왔다. 인격신의 지향이 아니라 다양성이나 상호 네트워킹 같은 것으로. 우주가 자기 파괴를 목표로 하는 것 같지는 않다면, 그 무언가를 괄호 쳐서 X라 부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

창조라는 단어의 의미 전환. 우주가 빅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창조를 말할 수 있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주신 조화로운 평화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말할 때, 창조는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상징이 된다. 다만 그렇게 바꾼 상징과 지금의 우주론 사이를 어떻게 매개할 것인가는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았다.

다음 회차는 슬라보예 지젝 — 유물론자가 기독교 언어를 쓰는 자리, 이날보다 매운맛으로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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