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요모임

2026. 5. 27. (게시 2026. 7. 14.)

"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이 왜 폭력일까?_지젝의 기독교 무신론

슬라보예 지젝의 기독교 무신론

읽은 글

슬라보예 지젝과 알렉스 오코너의 대담(2025년 11월 9일, 런던). 지젝의 『기독교 무신론』(2024, 국내 번역 진행 중)의 내용을 대화로 풀어낸 자리다. 오코너는 20대 중후반의 진행자로 십대 때부터 이 주제로 토론해 왔고 채널 구독자가 200만이다. 스스로를 긍정적 불가지론자라 부른다.

지젝은 자신을 「기독교 무신론자」라고 소개한다. 도킨스가 말한 문화적 기독교인 — 신은 없지만 기독교 문화는 좋다는 쪽 — 과는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논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아인슈타인은 스피노자주의자로서 인격적 신은 믿지 않되 우주의 경이로운 조화를 말했다. 인격신을 가져오면 신정론과 폭력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 2차 대전과 유대인 학살의 시대였다.

그리고 전지구적 진리는 없다로 간다. 라캉의 대타자 개념이 여기 놓인다.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의 끝자락에 있는 것들은 실은 인간의 욕망과 투사와 사회적 구성으로 만들어진, 비어 있는 자리라는 것. 홀로코스트든 나치든 큰 관점에서 보면 신의 뜻이 있다는 식으로 퉁치려는 기독교 형이상학이 그가 겨냥하는 표적이다.

공산주의 운동도 같은 신학이라고 말한다. 지금 참고 견디면, 때로는 독재도 필요하고 피해도 감수하면 새로운 사회가 온다는 논리 — 그것도 전지구적 진리 개념이다.

그래서 결론이 이렇게 온다. 초월적 원리로서의 신은 죽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신은 진짜로 죽어 없어졌다. 그다음에 남는 것이 성령이고, 성령은 공동체 자체이며 급진적 평등 운동이다.

욥기는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읽는다. 친구들이 고통에 의미를 붙이는데 하나님은 친구들이 틀렸다고 하고 고통에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지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하나님의 실패담으로 읽는다 — 너만 특별하냐, 나도 창조에 실패했다는 식으로.

이날의 질문

굳이 왜 무신론이어야 하는가.

하고 싶은 말 — 급진적 평등, 연대 — 에는 이날 참석자 대부분이 동의했다. 갈린 것은 그 결론에 이르기 위해 신을 없애는 경로가 정말 필요한가였다.

쟁점 하나 — 왜 이 사람은 강한가

첫 소감이 이 물음을 열었다.

노선을 단순화해 강화하고 레이어를 쌓는 타입이 아니다. 자기 파괴적이면서, 조화되지 않는 두 개념을 골라 완결시키지 않은 채 교차시킨다. 자기 언어로 쓰면서 자기모순적인 상태를 일부러 노출하는 용기가 있다. 그런 포지션을 가진 사람은 대화에서 거의 최강자가 된다는 것.

프리스타일 래퍼 같다는 표현도 나왔다. 순발력과 창의력이 좋고, 무언가를 비틀어 말하거나 비판할 때 영향력이 크다.

다만 이것이 곧 약점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그가 순발력을 발휘하려면 상대를 단순하게 세워두어야 한다. 현대신학이 이 문제들을 어떻게 다뤄왔는지를 모르는 것인지 일부러 다루지 않는 것인지는 물어봐야 하지만, 다룬다면 그 그라운드에서 뛸 수 없어진다.

쟁점 둘 — 성서 읽기에 원칙이 없다

가장 강한 비판이 여기서 나왔다.

한 사람 안에서 세 가지 독법이 뒤섞인다. 하나님이 잔인하다고 말할 때는 진멸 기사를 문자적으로 읽는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신 자신이라고 말할 때는 삼위일체라는 교리화된 신을 전제한다. 성령이 공동체라고 말할 때는 상징적으로 읽는다. 어느 대목은 문자로, 어느 대목은 교리로, 어느 대목은 상징으로 — 원칙이 일관되지 않는다.

해석이란 텍스트가 보여주는 모습에 대한 기본 이해를 공유하고 그 여백에서 자기 생각을 확장하는 것인데, 이 사람에게는 전제가 확립되지 않은 채 확장만 있다는 것. 플라톤을 해석할 때도 자기가 느낀 바를 말할 수 있지만 헛소리를 하면 혼난다 — 정답이 정해져 있어서가 아니라 공유해야 할 텍스트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진멸 기사에 대한 지적이 예로 놓였다. 오늘의 기준에서 잔인해 보이는 그 본문이 하나님의 구원 약속 안에서 어떤 의미로 서술되고 고백되었는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쌓여 있는데, 지젝은 그것을 하나도 보지 않고 「사람을 죽였으니 잔인하다」 한 줄로 간다. 표피만 건드리는 지적이라는 것.

쟁점 셋 — 그가 반대하는 신은 어떤 신인가

무신론은 특정한 유형의 유신론의 반대다. 신을 반대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신 관념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젝이 반대하는 신은 무엇인가.

우주적 통치자로서의 신이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이룬다고 공언하며 우주의 질서를 지배하는 신. 대타자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형이상학화된 신이고, 성서가 증언하고 고백하는 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그리스도교 역사가 예수와 성서를 왜곡해 온 과정이 상당하다고 볼 때, 지젝은 그 왜곡을 거치고 거쳐 19세기 헤겔이 생각했던 정도의 신을 데려다 놓고 그것을 공격하면서 기독교의 신을 깨부수고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전략 자체는 솔깃하다는 인정이 붙었다. 밖에서 신이 없다고 외칠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와 내부 모순을 공격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그의 말은 옳다. 문제는 그가 실제로 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는 것. 수박이 있으면 수박도 아니고 껍질도 아니고, 껍질보다 더 멀리서 수박의 화학 구조식을 붙들고 씨름하는 형국이라는 비유가 나왔다.

쟁점 넷 — 그렇다면 왜 무신론인가

손을 잡으면 될 일 아닌가. 예수가 하려던 것도 로마의 정치 질서를 뒤집는 것이었다. 바울이 「예수가 주님이다」라고 한 것은 로마 황제가 주님이라는 고백에 맞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그들을 목숨 걸고 그렇게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하나님이 없어져야 한다고 하는가.

단순한 유물론자이고 혁명주의자라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과 손을 잡을 것이라는 말이 이어졌다. 「당신들이 꿈꾼 하나님의 나라가 자본주의적 억압을 극복하고 함께 연대하는 체제 아니냐, 하나님 이름으로 같이 혁명하자」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무신론을 주장하는 논리도 빈약한데 그것으로 얻는 것이 거의 없어 보인다는 진단이었다.

그럼에도 필요하다는 쪽

평등성 때문이라는 답. 고차원적 질서가 십자가를 통해 완전히 붕괴해야 그 제로 지점에서 비로소 평등한 공동체가 태어날 수 있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유롭게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구도다.

주체가 눌려 있다는 답. 이날 가장 깊이 들어간 옹호가 여기서 나왔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맨 얼굴을 보기가 정말 어렵다. 종교적 열심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 캐릭터를 옅어지게 하는 과정을 성화라고 부른다. 개인성과 욕망이 이기심으로 해석되고, 그것을 차분히 눌러 주는 틀 안에서 사람을 대하게 된다. 그러니 그 사람을 대한 느낌이 적다.

그 사람이 그 사람다워지려면 누르는 신 — 지옥으로 누르는 신, 공포로 자리잡은 신 — 이 한번 깨져야 한다. 그러고 나서 드러나는 얼굴이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지만, 그 얼굴을 가진 사람과 신앙을 하고 싶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지젝의 공격은 타당하다는 결론이었다.

여기에 실용적 관점도 붙었다. 지금 형태의 개신교 규모가 줄어드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에 필요하다고 본다면, 한 명이라도 이탈시키기 위해 이런 담론이 필요한 면이 있다는 것.

죄의식이 근거로 제시됐다. 교회를 떠난 청년들을 심층 인터뷰한 45분짜리 방송에서 인터뷰이들이 계속 반복한 단어가 「죄」였다는 관찰이다. 봉사를 중단할 때, 참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을 때, 그리고 떠난 뒤에도. 매 순간 하나님이 지켜보며 너는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세계.

쟁점 다섯 — 양자역학을 이렇게 써도 되는가

지젝은 미시 세계의 불확정성을 「우주의 근본 현실은 불확실하다」로 읽고, 그 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과학 쪽에서 반론이 나왔다. 양자역학은 100년 전에 나온 오래된 이론이고, 그것으로 레이저도 만들고 MRI도 만든다. 그런데 일반인이 다루기 어려우니 은유로 표현한 것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그러다 보면 물리학이 하는 말과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렇게 쓰는 이유가 있다는 정리도 붙었다. 미시 세계의 붕괴를 먼저 보자 — 기독교 언어로는 세계가 타락했다, 혹은 훨씬 더 나쁜 곳이다 — 여기서 시작해 직시하는 것이 낫다는 논리를 위해 양자역학을 프레임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진행자가 표방하는 우주적 회의주의에 대해서도 「그것도 거품이니 포장하지 말라」고 밀어붙인다.

쟁점 여섯 — 그의 전략은 무엇인가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일관될 필요가 애초에 없었을 것이라는 관점이 제시됐다.

파편화되어 있어도 그 파편들이 각자 할 일을 한다. 하나의 신학 체계로 기독교를 부정하기보다,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점마다 딱지를 붙이듯 여기 문제 있잖아 하고 지적하는 편이 목적 달성에는 더 효과적인 전략이었으리라는 것.

지젝의 신학은 부재의 신학이라는 정리가 이어졌다. 텅 빈 공백을 응시하고 그 공백을 연대로 채우자는 것. 니체가 신의 없음을 바라보는 강함에서 초인에 이르렀다면, 지젝은 그 공허를 연대로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 신을 의지할 수 없으니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서로 연대하는 것뿐이다 — 이 말을 하기 위해서라면 기독교 신학에 깊이 들어올 필요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읽기다.

그가 원한 것은 서양 정신의 한 축을 가져다 쓰는 것이고, 성경에 나오는 성령 이야기 — 개인성이 강하고 주체가 중요하고 자율성이 있는 — 를 활성화시켜 혁명을 일으키자는 정도의 전략이었으리라는 것.

쟁점 일곱 — 연대는 무엇에 기대는가

이날 가장 날카로운 반론이 마지막에 나왔다.

애착을 없애 놓고 연대하자는 말이 성립하는가. 신이 있으면 그 애착을 신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면서,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자기가 더 차지하려는 욕망을 덜어내는 방향이 열린다. 종교가 하나됨에 기여한 부분이 거기 있다. 그런데 텅 비어 있으니 연대하자는 말은 어불성설로 느껴진다는 것.

낭만에 기대고 있다는 진단이 이어졌다. 연대는 낭만이다. 그 낭만을 함께 느끼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공허하게 들리고, 안 될 것 같다고 느껴진다. 추진력을 잃은 상태에서 운동성을 내기에는 바탕이 빠진 느낌이라는 것.

그래서 이런 문장으로 정리됐다. 이 사람은 추종자는 만들 수 있어도 커뮤니티는 못 만들 것 같다. 사람들이 모여 도란도란 생활할 생태를 구축할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말 밑에서는 사람이 거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

곁가지 — 주체를 강요하는 것도 폭력이다

지젝의 아이디어를 우리 쪽으로 가져온다면 무엇을 조심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이 답이 나왔다.

군중 속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기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리의 중간 존에 있을 때 행복한 사람이 실제로 있고, 그 사람들은 개조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주체를 강요하는 것 자체가 타자의 욕망이고 폭력일 수 있다. 교회에 오는 사람에게 주체가 되지 않을 떳떳한 권리를 인정하는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

여기에 취향의 비유가 붙었다. 어릴 때 훈육된 취향으로 평생 짜장면만 먹고 죽어도 괜찮지만, 이왕이면 다른 것도 먹어보고 만들어도 보고 실패도 해보는 과정이 재미있을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욕망이 되려면 보여야 하고 공유돼야 한다. 그 방법론을 고민하지 않고 바로 결론으로 가버리면 지젝을 쓰는 민중신학이 엘리트 교회가 되는 일이 벌어진다.

곁가지 — 신은 얼마나 개입하는가

지젝이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 — 고통이 더 큰 계획의 일부라는 간증의 문법 — 을 두고 각자의 자리를 물었다.

개입하지 않을수록 자유의 범위가 크다는 답이 나왔다. 열린 결말을 만드는 창작자의 마음 같은 것. 얼마나 자유로웠으면 개입이 없을까 하고 본다는 것.

부분적으로만 안다는 답도 나왔다. 성서 안에도 고통을 두고 신의 뜻이라 하는 대목과 나도 모르겠다는 대목과 악마 때문이라는 대목이 섞여 있다. 사람은 고통의 능선을 지나며 자기 최선의 지식과 신앙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자기 고통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은 악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모든 고통을 하나로 환원하려는 것남의 고통에 함부로 말하는 것이 문제다.

개입을 전제하지 않고 움직인다는 실천의 자리도 나왔다. 고통 중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기도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현실적으로 도울 방법을 찾아 움직인다. 그러면서 한 뼘의 틈은 남겨둔다 — 신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정의할 수 없지만 그 가능성 때문에 기도하고 행동한다. 실패할 확률과 최악의 상황도 함께 인정하면서.

⚠ 여기에 유보가 붙었다. 정말 힘든 사람에게는 신정론이 아니라 그냥 신 자체를 믿고 싶을 수 있다. 그 상황에서 종교마저 빼앗는 것은 잔혹할 수 있다는 것.

곁가지 — 신 죽음의 신학

지젝의 배경으로 알타이저가 소개됐다. 1·2차 대전 이후 나온 사신학의 가장 끝에 있는 사람으로, 예수 사건 안에서 신은 스스로 물러섰고 정말 죽었다고 보되 그것을 긍정한다. 그래서 신성이 세상에 흩뿌려졌고, 우리는 예수 없이 신을 따르는 훈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몰트만은 그보다 앞에서 멈춘다 — 성부도 십자가에서 함께 고통을 느꼈다는 쪽. 그 신학자들이 모두 전쟁의 고난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 함께 놓였다.

한국 민중신학이 지젝을 많이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급진적 평등과 바울의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다」는 방향이 맞아떨어진다. 다만 기독교 무신론의 장단점을 충분히 공유하지 않고 결론만 가져오는 것이 아쉽다는 지적이 붙었다. 종교의 내부 붕괴를 목표로 한다는 그의 의도는 잘 공유되지 않는다.

남은 것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젝이 우리에게 그렇게 물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오자, 87년 이후의 이야기가 놓였다. 민주화의 꿈이 좌절된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 지금은 광장이 필요한 때가 아니라 각자 놓인 자리에서 함께 꿈꾸던 것을 실천할 때라는 글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이런 답을 주고 싶다는 정리로 닫혔다. 이런 모임 자체가, 다양한 생각을 교환하고 확장할 기회를 만드는 것이, 죄의식에 절어 있는 젊은이들과 다른 감각의 신앙을 유지하고 성장시킬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노력의 큰 부분이라고.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가 자라 새가 깃드는 것이니, 이것이 지금 여기서 실천하는 혁명의 과정 중 하나라고.

성서가 모순 덩어리라는 것을 솔직히 공유하자는 제안도 남았다. 성서는 하나로 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묶음집이고, 지금까지의 신학자도 앞으로의 신학자도 결국 부분적일 텐데 전문성을 가지고 노력하는 정도로 봐주면 좋겠다는 것. 그러면 참여자들이 주체성을 가지고 각자의 해석을 나눌 수 있고, 그것이 맞느냐 틀리느냐의 손가락질이 아니라 「기발하다, 나는 이렇게 읽었다」가 오가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 그 방법론이 열린 물음으로 남았다.

토마스 뢰머의 구약의 어두운 신 논의를 다음에 다뤄보기로 했다. 고대인들이 어떤 감성에서 신을 묘사했고 그것이 어떤 과정으로 성서가 되었는지를 알면, 같은 본문을 두고 지젝처럼 읽지 않을 수 있는 감각이 생긴다는 이유에서다.

← 수요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