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바다의 문들』
읽은 글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바다의 문들』. 2004년 인도양 쓰나미로 25만 명이 죽은 뒤에 쓴 신정론 책이다. 강연록 번역본과 인터뷰를 함께 읽었다. 제목은 욥기 38장에서 왔다 — 바다가 터져 나올 때 문으로 막은 자가 누구냐고 묻는 대목이다.
저자는 정교회 계열의 철학 신학자로, 신무신론자들과 여러 차례 논쟁한 사람이다. 이런 재난이 올 때마다 반복되는 두 극단 — 그런데도 신이 있느냐는 냉소와, 여기에 신의 뜻이 있다는 과도한 신학적 해석 — 사이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정리하려 한다.
논지는 네 갈래다. 고통과 죽음에서 긍정적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 것. 악은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핍이다(플로티노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온 명제). 모든 사건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원인으로 결정한다는 섭리 이해는 틀렸다 — 칼뱅주의 예정론을 강하게 비판한다. 성부도 성자와 함께 십자가에서 고난받았다는 몰트만 계열의 접근도 비판한다. 그런 감성적 접근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종말론과 부활을 끌어온다. 지금의 악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되, 하나님이 이 결핍된 우주를 회복시키리라는 희망은 가져야 한다는 쪽이다. 자신을 굳이 규정한다면 오리게네스주의자라고 말한다 — 우주적 스케일의 구원을 상상한 초대 교부다.
이날의 질문
신정론에서 어디까지 말할 수 있고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
논리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 이 책을 가져온 이유였다. 완결된 논리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재난 앞에서 종교인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있다.
쟁점 하나 — 지연된 목적론 아닌가
책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고, 앞부분에는 동의가 모였고 뒷부분에서 갈렸다. 전통적 신정론을 비판하는 대목은 설득력이 있는데, 자기 이야기를 하는 뒷부분에서 결국 종말론과 부활로 간다.
그러면 앞의 비판이 감퇴되는 것 아닌가. 종말에 악인이 심판받고 선인이 보상받는 상태를 상정하면, 그것은 지연된 목적론이다. 시점을 미래로 옮겼을 뿐 구조는 같다.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서사가 여전히 잠재해 있고, 그 서사가 전제되어야만 물리적 악과 도덕적 악이 한데 섞여 설명될 수 있다.
같은 지적이 다른 각도에서도 나왔다. 부조리에 대한 분노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이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라는 대답으로 귀결된다. 묵시록적 시간으로의 무책임한 유보가 아닌가.
쟁점 둘 — 악은 선의 결핍인가
이날 가장 오래 붙든 쟁점이다.
반대 쪽. 쓰나미에는 지각판 충돌이라는 명백한 물리적 실재가 있다. 그것을 실체 없는 결핍이나 타락한 영적 세력 같은 형이상학적 언어로 치환하면 무게가 축소된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빛밖에 없는 방에서는 그림자가 생길 수 없다. 완전한 선에서 어떻게 결핍이 시작되는지를 이 틀은 설명하지 못한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신의 책임을 면제하기 위한 급조된 논리로 보인다.
찬성 쪽. 선의 결핍이라는 명제의 첫 번째 함의는 존재하는 것은 다 선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유한자로서 갖는 한계 때문에 결핍이 생기고, 그 결핍의 공간에 악한 행위가 곰팡이처럼 자란다. 전등에서 멀어질수록 덜 밝아지는 것과 같다.
핵심은 희망 쪽에 있다는 답이 이어졌다. 악이 실체가 아니라는 말은 악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악은 너무나 강력하게 실재한다. 다만 지속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만약 악이 선과 나란한 실체라면 그것을 제거할 방법이 없고, 우리가 추구하는 선의 세계에 도달할 희망도 없다. 그래서 이 명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
⚠ 다만 오해를 막는 단서가 붙었다. 선의 결핍이라는 말은 「악해 보이지만 선하다고 봐줘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트 자신도 악에 분노하고 악과 싸우라고 말한다. 실제 악을 보면서 저건 선의 결핍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관념이고 망상이다.
본성과 기원이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왔다. 본성 쪽에서는 결핍이라고 말하면서, 기원 쪽에서는 「원수」라거나 악한 영이 있다고 느껴진다는 언어를 쓴다. 실체적 악을 거부한다면서 다시 실체화하는 모습이다. 스스로 영지주의 혐의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은 정직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멈췄으면 좋았을 것을 기존 신학과 조화시키려다 무리가 생긴 것 아닌가.
쟁점 셋 —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의 오남용」이라는 하트의 설명이 모호하다는 물음에서 시작해, 가장 멀리 간 대목이 되었다.
하트가 말하는 자유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그는 선택의 자유를 공허하다고 지적한다 —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고르는 것이니 그 선택이 나에게서 오지 않는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본성을 성취해 가는 자유, 선과 합치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운영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만의 언어는 아니라는 정리가 이어졌다. 자유라는 말을 처음 쓴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자유는 우주의 로고스적 질서에 자기 존재를 일치시키는 노력이었다. 칸트의 자율도 같은 형태다 — 자기가 세운 도덕법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 스피노자에게도 선택 의지로서의 자유는 없고, 자연의 인과를 명확히 알아 자기 본질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데서 오는 기쁨이 자유다. 신이 정한 목표냐 자기가 세운 법이냐가 다를 뿐, 본성에 자기를 맞추려는 노력이라는 틀은 같다.
근대에 결정론이 등장하면서 자유를 결정론의 반대편에 세우게 되었고, 그러면서 「나의 본성과 목적에 부합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빠져버렸다는 진단도 함께 나왔다.
섭리라는 배경이 있어야 이 자유가 이해된다는 정리가 붙었다. 하트는 잘못된 섭리와 제대로 된 섭리를 가른다. 잘못된 섭리는 모든 사건을 하나님이 원인으로 결정한다는 것. 제대로 된 섭리는 하나님이 전능을 제한하고 인간이 자유롭게 살 공간을 내신 것이다.
여기에 야간자율학습 비유가 붙었다. 담임이 빠지고 싶은 사람은 빠지라고 한다. 어떤 아이는 사정이 있어 빠지고 어떤 아이는 땡땡이를 칠 것이다. 그럴 줄 모르지 않지만, 강압과 수동성을 가르치는 것보다 자유를 체험하는 교육이 낫다고 보기 때문에 통제하지 않는다. 의도하지는 않되 허용하는 것이 여기서의 섭리다.
반론 셋
① 비종교인에게는 구속으로 들린다. 종교 바깥에서 이 자유를 들으면 숨이 막힌다.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것을 자유라고 부르는 것이다. 구속이라는 말이 훨씬 와닿을 내용에 자유라는 포장지를 씌운 느낌 — 「참 자유는 구속이야」라고 말하는 셈이다.
② 자연악에는 자유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야자 비유는 도덕악의 영역에는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런데 지진이나 질병에서 자유를 행사할 주체가 누구인가. 판구조론에 자유가 개입할 자리가 없다.
③ 자유를 위해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신의 속성이 사랑이라면, 아무리 잘못해도 부모가 아이 손을 가스불에 집어넣지는 않는다. 인간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쓰나미로 사람들이 죽어도 된다는 논리로 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의도와 허용은 다르다는 답이 나왔다. 세계를 불완전하게 만든 목적은 자유이고, 부조리는 그 불가피한 부산물로 들어온 것이지 의도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허용 자체가 무책임하다는 반문이 다시 붙으면서 여기서 맞물렸다. 아이가 가스불에 손을 대고 있는데 그냥 두는 것도 허용이다.
인격신 개념으로 가면 신정론은 한 발짝도 못 나간다는 정리가 이 자리에 놓였다. 그 구도에서는 쓰나미가 올 때 왜 슈퍼맨을 보내 대피시키지 않았느냐고 따지게 된다.
쟁점 넷 — 완전이라는 입구
이날 가장 날카로운 전환이 여기서 나왔다.
우리는 완전이라는 입구로 들어가서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완전을 기본값으로 놓고 지금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고 말하면, 그 책임 소재가 자동으로 신에게 흘러간다. 처음부터 신을 두드리기로 작정한 프레임으로 대화를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하트 자신은 타락하지 않은 창조의 시기가 따로 존재했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원래 완전한 세계가 있었는데 깨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완전한 창조는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완전이라는 입구에 들어가지 않고도 불완전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존재는 선하다」 대신 「모든 존재는 악하지 않다」에서 출발하면, 상대적인 개념들이 편안하게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는 제안이었다.
출발점의 문제라는 정리도 이어졌다. 에덴에서 출발할 것인가, 야생에 던져져 맹렬히 경쟁하는 인간에서 출발할 것인가. 후자로 이해하면 하트의 이야기가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러면 에덴은 없느냐 하면, 그것은 만족에 대한 상상이고 종교가 그런 심상을 쓰는 것은 마땅하다는 쪽이다.
다만 완전 개념을 빼도 문제는 남는다는 반론이 붙었다. 우리는 더 안전한 상태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도 삶이 슬프고 비극적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것만으로 이 세계가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기준은 결국 선 — 존재의 결핍이냐 충만이냐 — 이라, 기원 신화를 설정하지 않아도 그 구도는 내재해 있다.
쟁점 다섯 — 선악은 절대적인가
스피노자 쪽에서 반론이 왔다. 스피노자에게는 악 개념이 먼저 생긴다. 나에게 해로운 것이 악이고, 선은 거기서 사후적으로 구성된 추상 개념이다. 선악은 실체적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상대적이다 — 상대주의가 아니라 상대성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선인 것이 동물이나 생태계의 관점에서는 악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좋은데 다른 존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도 있다.
그럼에도 「존재는 선하다」는 명제는 제한된 의미에서 살릴 수 있다는 정리가 이어졌다. 그것은 선이라는 가치를 객관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가 제대로 기능하고 본성이 작동할 때 그 존재에게 좋다는 뜻이다.
절대적 선악을 교리화할 때의 위험이 함께 지적됐다. 토마스 아퀴나스식 목적론에서 성기관의 목적을 출산으로 놓으면 출산하지 않는 성행위에 대한 규범이 따라 나온다. 어디에서나 절대적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교리화됐을 때 상당히 위험하다.
관계 안에서 선악을 본다는 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체결 안에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정해지듯, 선악은 체결된 관계 속에서 서로 동의한 것이다. 구약은 질병을 악으로 보는데 신약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 것도 그 변천이다.
곁가지 — 태도의 문제로 남기기
목회 현장의 실용적 관점에서 정리한 대목이 있었다.
성서에는 신명기 사관처럼 잘못했으니 벌을 받는다는 구절이 많다. 그런데 곳곳에 그 인과를 벗어나려는 구절도 있다. 요한복음의 눈먼 사람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이 사람의 죄냐 부모의 죄냐 묻자 예수는 그것이 아니라고 답한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 이야기도 그렇다.
이 구절들의 핵심은 「고난에 선한 이유가 있다」가 아니라 「죄와 질병을 인과로 묶지 말라」는 데 있다는 읽기다. 말을 멈춰야 하는 지점이 있고, 도울 수 있을 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정도의 합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나왔다. 자기 고통을 자기 신앙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응원해도 된다. 다만 남의 고통, 특히 재난으로 끝난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인과를 붙이지 않는다. 성서 자체가 그 인과를 깨는 구절을 여럿 갖고 있으니 확정적 언어를 쓸 필요가 없다.
곁가지 — 신을 대하는 자세의 차이
정교회와 가톨릭 쪽에는 신에 대해 수직적인 구도가 있고, 개신교에는 하나님과 나를 멘토와 멘티처럼 놓는 구도가 있다는 관찰이 나왔다. 후자가 친밀하지만 맞먹는 듯한 자리가 되고, 그래서 신정론에 대한 감도가 달라진다는 것.
내 삶이 어찌 되든 하나님이 원망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감각이 깔려 있으면 욥기를 읽으면서 화가 나지 않는다. 수동적일 수도 있고 고통을 덜 겪어서일 수도 있지만, 힘든 일과 하나님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증언이었다.
곁가지 — 하트가 싸우는 상대들
인터뷰 뒷부분의 대화가 재미있었다. 신무신론자들을 두고 도킨스는 삼류라 하고, 샘 해리스에 대해서도 날이 서 있다. 대니얼 데닛과는 의식 문제로 많이 붙었던 모양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좋아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사라지면 세상이 더 나아지겠느냐는 물음에 다른 이들이 모두 그렇다고 할 때 히친스만 유보했고 도킨스가 그를 노려봤다는 일화가 나온다.
마지막에는 세계가 고통이라면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까지 간다. 논리적 전제로만 보면 맞는 말인데, 세계를 그렇게 흑백으로만 봐야 하는가라는 유보가 붙었다.
남은 것
욥기와 위로. 이날 가장 많이 남은 문장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였다.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가 함께 놓였다. 남편이 죽고 곧이어 아들이 사고로 죽은 뒤 하나님에게 해명을 요구하지만 한 말씀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면하고 함께 겪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발견하면서 치유된다. 그때 깨닫는 것이 저주하고 원망할 때 하나님이 옆에 계셨다는 것이다.
욥기도 같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설명해주지 않는다. 바다와 짐승 이야기를 한참 하고 나면 욥이 「이제 주를 뵙습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라고 한다. 그 회개라는 단어를 위로로 번역할 수 있다는 제안이 있다. 고통이 해소된 것은 없지만 위로를 받는다는 것.
하나님은 선하시다가 아니라 결코 악하신 분이 아니다 — 욥기에서 뽑은 주제가 이렇게 정리되기도 했다. 그 선에서라면 욥기가 여전히 뛰어난 책이라는 것.
두 종류의 사람. 감성적 접근이 바로 가능한 사람이 있고,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최소한의 틀이 먼저 있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 후자에게는 「하나님은 우리 고통 옆에 계신다」는 말을 백 년 해도 들어오지 않는다. 증명하자는 것이 아니라 감성이 작동할 수 있는 틀을 원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어떻게 함께 데려갈 것인가가 열린 채로 남았다.
신은 어떤 방식으로 세계에 개입하는가. 우주 바깥에서 개별 사건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와 인프라를 물질 세계에 서포트하는 간접적 방식일 것이라는 상상이 제시됐다. 이신론적 우주에 침습해 들어오는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나왔다. 개입은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신으로부터 온다는 쪽이다.
다음 회차는 경험주의 철학자가 본 신앙 — 브레이스웨이트를 읽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