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스웨이트 읽기
읽은 글
R. B. 브레이스웨이트, 「종교적 신념의 본질에 대한 경험주의자의 관점」(1955). 케임브리지의 과학철학자가 논리실증주의 진영 안에서 종교 언어를 옹호하려 한 강연문이다. 함께 읽은 두 번째 글은 클리퍼드와 윌리엄 제임스의 증거주의 논쟁을 다룬 국내 논문.
브레이스웨이트의 제안은 이렇다. 종교적 진술은 사실을 묘사하는 문장이 아니라 수행문이다. "신은 사랑이시다"는 우주의 상태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아가페적 삶을 살겠다는 행위 정책의 선언이다. 여기에 종교 서사가 결합한다. 이야기의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그 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것이 도덕적 실천의 심리적 동력이 된다.
언어행위 이론이 등장하기 전에 쓰인 글이면서 비트겐슈타인 중기의 언어사용론을 상당히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 이날 반복해서 지적됐다.
이날의 질문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어도 신앙이 성립하는가.
여섯 명이 답했고, 답은 두 축에서 갈렸다. 하나는 사실성을 얼마나 요구하는가, 다른 하나는 신앙의 근거를 논증에 두는가 감정과 체험에 두는가. 두 축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점이 이날의 발견이었다. 논증형 두 사람이 사실성 요구에서 정반대에 섰고, 감정·체험형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이유로 같은 자리에 섰다.
쟁점 하나 — 팩트라는 단어의 자격
세 개의 입장이 같은 단어를 다르게 쓰면서 논쟁이 한동안 겉돌았다.
기각하는 쪽. "팩트냐"는 물음 자체가 근대철학의 산물이고, 실증주의자들이 던지는 얄팍한 개념일 뿐이다. 성서는 미토스의 언어로 쓰였는데 로고스의 잣대를 들고 와서 난도질하고 있다. 창세기가 6일 창조를 말하는 것이 팩트냐고 묻는 순간, 그 안에 담긴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 통찰을 볼 눈이 사라진다.
층위를 나누는 쪽. 실재성은 심리적 실재, 물리적 실재, 마음 독립적 실재로 나뉜다. 검증주의는 거부하지만 개념 자체는 살려야 한다. 경전의 핵심 줄거리와 그 밑에 깔린 기반적 믿음 — 신이 존재한다, 신이 전선하다 — 은 참이라고 믿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 그 이후의 것은 알레테이아, 은폐된 것이 드러나는 진실의 차원이다.
최소한을 요구하는 쪽. 연대기적·문자적 사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도가 공통으로 믿는 핵심 — 부활 같은 — 만큼은 팩트여야 한다. 팩트라는 꼬리가 없으면 도덕적 결단은 시들고, 스토리와 태도 표명으로만 환원하면 실존적 동력을 잃은 공허한 외침이 된다.
쟁점 둘 — 성서와 소설은 무엇이 다른가
"팩트가 없으면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과 층위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반문에 두 갈래의 답이 나왔다.
존재론적 답. 일반 문학 작품에는 없는 것이 성서에는 있다. 세계의 신성함, 근원성, 우리의 세계를 넘어서는 초월의 계기와 궁극적 실재에 대한 경험. 해리포터에는 그것이 없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작가가 그려낸 세계에 참여하지만, 성서를 읽을 때는 궁극적 실재와 접촉한다. 브레이스웨이트가 스토리를 윤리적 결단을 강화하는 수단으로만 본 것은 이 존재론적 가능성을 통째로 놓친 것이다.
화용론적 답. 소설은 애초에 실제인 척을 하지 않는다. 성경은 최소한 척은 한다. 저자가 이것을 실제로 여기도록 요청하고 있고, 그 요청 자체가 지배력을 갖는다. 특히 바울의 부활 진술은 명백히 "이건 팩트니 믿어라"를 요구한다. 그 요청에는 의미로 우회하지 말고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로 정면 응답하는 것이 정직한 태도다. 교회 안에서 회피하는 것처럼 들리는 대답은 하지 말자는 것.
고대인의 역사 인식.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솔론의 추도 연설은 투키디데스가 지어낸 것이다. 쓴 사람도 읽는 사람도 그것을 안다. 그런데도 전체를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작성된 고대 문헌을 근대적 실증 사관으로 파고들면 대상과 도구가 어긋난다.
쟁점 셋 — 감정은 신앙의 무엇인가
가장 늦게 열렸고 가장 멀리 간 쟁점이다.
현실 진단으로서. 스스로 판단하고 팩트를 체크해서 실천하는 사람은 100명 중 한둘이고 대부분은 감정으로 움직인다. 브레이스웨이트가 그린 자율적 인간은 비현실적이다. 코끼리와 기수 — 거대한 에너지는 코끼리인 감정이고, 합리적 판단은 그 위에 탄 작은 기수다.
출발점으로서. 논리적 정합성을 만나야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과 마음의 무언가를 만나야 시작하는 사람을 보통 둘로 나누지만, 사실은 하나다. 논리 자체가 감정을 느끼는 방법론이다. 팩트를 확인해야 한다는 사람도 확인해야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예술적 체험과 종교적 체험이 같은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관찰도 여기서 나왔다.
학설사로서. 흄 이래 경험주의 전통은 원래 도덕을 이성이 아니라 감각과 감정의 문제로 다뤘다. 논리실증주의자들도 도덕 문장을 명령문이나 감탄문으로 분석했다. 이 사람들이 인간을 합리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임상으로서. 도덕 심리학에서는 도덕 판단이 명제적으로 경험되는 자동적 정서 판단이라는 연구가 축적되고 있다. 감정이냐 명제냐로 갈라 온 두 갈래가 어쩌면 처음부터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이 말로 모임이 닫혔다.
곁가지 — 팩션이라는 제안
성서는 소설이 아니라 팩션에 가깝지 않겠나. 사실에 근거해 저자가 의도를 가지고, 독자가 이렇게 느꼈으면 좋겠다는 방향으로 쓴 글. 고대 역사 자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일정 부분 팩션이다.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의 일화가 근거로 나왔다.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누워 소설을 읽으면 재미있고 환상적인데 다 읽고 나면 허무했다. 더 읽을 책이 없어 성경을 같은 방식으로 읽었더니 고통스럽고 힘들었는데, 끝나고 나면 마음이 풍요로웠다. 예수회가 시작된 자리다.
남은 것
개인성을 둘러싼 교차가 가장 뚜렷한 미결로 남았다. 한쪽에서는 찰스 테일러를 끌어와 개인주의적이고 사사화된 신앙이 공동체적 실천과 의례를 죽였다고 비판했고, 다른 쪽에서는 심리학에서 개인성이 중요하고 긍정적으로 다뤄지며 신과의 애착이 온전할수록 타자와 연결되려는 욕구가 증가한다고 반대 방향을 냈다. 애착이 완성되지 않을 때 집단에 뭉쳐 해결하려는 부정적 작동으로 간다는 관찰도 함께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