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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7. 8. (게시 2026. 8. 15.)

아닐 세스 vs 이언 맥길크리스트 — 의식은 뇌가 만든 환각인가

이언 맥길크리스트 vs 아닐 세스

읽은 글

이언 맥길크리스트와 아닐 세스의 대담. 뇌와 의식과 신에 관한 긴 대화로, 참석자 한 분이 풀버전을 번역하고 검수해 공유해 주셨다.

맥길크리스트는 좌우 반구를 연구한 신경과학자이자 철학자다. 국내에 『주인과 심부름꾼』이 번역돼 있다. 좌반구는 수학, 우반구는 그림이라는 옛 구분과 달리, 지금은 작동 방식의 차이로 본다 — 좌반구는 부분에 집중하고 추상적 논리를 다루며, 우반구는 전체 틀을 종합적으로 살핀다. 둘은 늘 함께 활성화된다.

그의 문명 비판이 여기서 나온다. 인간의 사유에서 주인은 우반구의 종합적 판단인데, 현대 문명이 분석적 사고에만 집중하면서 심부름꾼이 주인 자리를 찬탈했다는 것. 부분에 과몰입하고 모든 것을 계량해 평가하는 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본다.

의식에 대해서는 이렇게 간다. 물질에서 의식이 어떻게 나오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주 자체가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조건을 가졌다고 보는 편이 정직하다. 뇌는 의식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아니라, 의식이 흐를 수 있도록 길을 내주는 강둑이라는 것.

아닐 세스는 신경과학자로서 끝까지 과학자의 자리를 지킨다. 지각은 세계를 그대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감각 신호로부터의 최선의 추측이며, 그래서 통제된 환각이다. 환각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통제된다는 쪽이 핵심이다. 자아도 지각의 한 형식이다. 의식은 진화 과정에서 창발했고 뇌의 작동에 수반된다.

공통점도 뚜렷하다. 둘 다 물질을 차갑고 둔한 덩어리로만 보지 않고, 사랑을 호르몬으로 환원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음악과 자연과 의례에서 오는 영성을 둘 다 중요하게 본다.

이날의 질문

의식이 처음부터 있었는가, 진화 중에 나왔는가.

그리고 그 물음이 곧바로 두 번째 물음을 끌어왔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어디까지 지킬 것인가. 맥길크리스트가 그것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이날 가장 오래 붙든 자리가 되었다.

쟁점 하나 — 어느 쪽이 설득력 있는가

세스 쪽으로 기울었다. 참석자 대부분이 그랬다.

마취와 치매가 근거로 놓였다. 마취하면 의식이 필름 끊기듯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진다. 치매는 MRI로 진단하는데, 뇌의 특정 부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개골과 뇌 사이 공간이 넓어지며 전체적으로 쪼그라드는 방식이다. 물리적 구조가 변할 때 의식 현상도 변한다면, 의식은 뇌의 작동에서 나온다고 보는 편이 옳지 않겠느냐는 것.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는 소감이 여럿이었다. 진화를 믿으니 의식도 진화 중 어느 순간 나왔다고 당연히 여겼는데, 다른 출발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는 것.

맥길크리스트는 낭만주의를 닮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우주에 근원적 일자가 있고 그것이 개인들에게 현현한다는 발상은 18세기 말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것이고, 본인도 스스로를 헤겔주의자라 부른다. 200~300년 전 형이상학이 지금 이렇게 표현되는 것이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끌린다는 쪽도 있었다. 신앙이 확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그의 말에 깊이 동의하고, 음악을 통해 신성에 닿는 감각도 같다는 증언이 나왔다. 다만 그 사람도 물과 얼음과 수증기의 비유는 이해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비유가 실제로 두 사람에게 다르게 쓰였다는 정리가 붙었다. 세스는 그것을 창발의 예로 든다 — n차원에는 없던 속성이 n+1차원에서 생기는 것. 맥길크리스트는 같은 비유를 범심론의 예로 쓴다 — 근본 실재가 정신이고 물질은 그것이 드러난 상이라는 것. 같은 그림을 두고 정반대로 읽고 있다.

쟁점 둘 —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거부해도 되는가

이날 가장 강한 경고가 여기서 나왔다.

맥길크리스트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이 이날의 반론이었다.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유물론 세계관)와 방법론적 자연주의(도구)는 구별해야 한다. 유물론 세계관은 받아들이지 않되 방법론은 수용하는 것 — 과학적·역사적 설명에 갑자기 기적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는 상식이다. 최근 한국 개신교 신학계에서도 자연스럽게 논의돼 왔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면 문이 열린다. 지적설계론이 그렇고, 「기독교적 과학」을 주장한 철학자가 그랬다. 창조과학으로 이어지는 중간 다리가 된다는 것.

더 안쪽의 문제도 제기됐다. 창조과학도 자기들 나름으로는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채택하고 있다고 선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핵심 명제 — 예수의 부활 같은 — 에도 그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가. 그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발상이 창조과학과 어떻게 다른가.

신학적 토대가 먼저라는 답으로 정리됐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채택하는 것은 좋지만 어떤 신학적 관점에서 수용하느냐가 결정적이다.

여기에 성서 해석의 세 단계가 놓였다. 융합(전통을 그대로 수용) → 거리두기(역사비평으로 문자적 해석에서 떨어짐) → 화해. 거리두기에서 멈추면 「성서는 다 신화다」로 가서 역사와 신화를 이분법으로 대립시키는 불화가 된다. 성서가 장르에 따라 다르고 장르마다 역사성의 의미가 다르다고 읽으면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

칸트식 한계 선언이 더 낫다는 제안도 나왔다. 인식의 한계를 선언하는 편이 이 맥락에서는 오히려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

쟁점 셋 — 세 낱말을 갈라야 한다

논의가 겉돌지 않으려면 개념부터 정리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전공자 한 분이 셋을 갈랐다.

범심론은 심신 문제에 대한 이론이다. 마음과 몸의 관계를 설명하는 여러 입장 중 하나로, 모든 물질이 어떤 수준에서든 정신적 차원을 갖는다고 본다. 최근 복권된 입장인데, 등장 배경은 딜레마다 — 몸과 마음을 별개로 보면 둘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설명이 안 되고, 물질 하나로 설명하면 거기서 의식이 어떻게 출현하는지 설명이 안 된다.

『갈릴레오의 오류』를 쓴 영국 철학자가 그 복권의 대표 논자다. 근대의 오류 중 하나로, 갈릴레오가 측정 가능한 양만 과학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정신을 객관적 논의의 틀에서 추방한 것을 지목한다. 데카르트가 그것을 굳혔고, 그래서 마음은 신비의 영역이 되어버렸다는 진단이다.

범신론과 범재신론은 신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이론이다. 자연이 곧 신이라고 하면 범신론, 모든 것이 신 안에 있다고 하면 범재신론이다. 차이는 포함 관계다. 범신론은 둘의 범위가 일치하고, 범재신론은 신 쪽이 더 넓다.

셋이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나왔고, 가능하다는 답이 이어졌다. 범심론은 심신 문제에 관한 학설이라 신 이해와 독립적으로 말할 수 있고, 범재신론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함께 인정하는 것이니 오히려 제대로 된 그리스도교 신론이라는 것.

인격신 개념이 축소되어 있다는 지적이 여기 붙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격신은 인격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힌 것이고, 그래서 범재신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

쟁점 넷 — 인격은 속성이 아니라 관계다

이날 가장 정밀한 대목이었다.

사랑이나 우정은 속성이 아니다. 건강은 내가 가진 속성이지만, 사랑과 우정은 둘의 관계에서만 성립하고 양방향이 다 성립해야 한다. 초월성과 내재성도 마찬가지다 — 무엇에 대한 초월이고 무엇에 대한 내재이지, 그 자체로 초월적이거나 내재적인 것은 없다.

그러니 인격성도 철저히 관계로 봐야 한다는 것. 인격을 관계적으로 보는 것은 형이상학적 반성의 결과를 신학에 적용한 셈이다.

같은 방향에서 이런 정리가 나왔다. 오늘의 인격신은 서로 응답하며 나아가는 신이다. 내가 없으면 네가 존재하지 않고 네가 없으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신. 홀로 떨어져 있는 단독자로서의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낱말의 뜻이 변해야 한다는 것.

쟁점 다섯 — 부활을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앞선 회차들에서 반복돼 온 물음이 여기서 더 나갔다.

서버 비유가 제시됐다. 나를 나 되게 하는 무언가가 우주의 어떤 자리에 보존되었다가, 물리적 시스템이 다시 세워질 때 돌아와 합쳐지면 1인칭 자아가 다시 발현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상상. 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뇌와 감각과 기억과 감각질이 융합된 그 조합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이 있다면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전문 물리학자들이 실제로 그런 상상을 한다는 점이 근거로 놓였다. 최근 작고한 영국의 입자물리학자, 『바다의 문들』을 쓴 신학자, 그리고 유물론자이면서 부활 문제 때문에 비슷한 주장을 하게 된 형이상학자까지.

반론 둘이 붙었다.

처음부터 의식이 낮았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저장할 기억 자체가 없다면. 동물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의식의 레벨이라는 표현 자체를 조심해야 한다는 답과 함께, 그 저장이 개체가 집행하는 일이 아니라면 동물에게도 같이 적용할 수 있다는 응답이 나왔다. 그러자 다시 물음이 이어졌다 — 어떤 신학자는 자기를 인식할 수 있는 자만 부활할 수 있다고 했는데, 진드기가 부활했다면 그것이 자기인지 모를 텐데 부활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4세기 형이상학과 닮았다는 관찰도 나왔다. 세계 전체를 관장하는 영혼이 있고 그것이 우리 안으로 흩어져 활동한다는 신플라톤주의의 그림과 발상이 거의 같다는 것. 첨단 과학과 고대 형이상학이 이렇게 만나기도 한다는 데 감탄이 이어졌다.

⚠ 다만 이것이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거부하는 쪽으로 흐를 위험이 함께 지적됐다. 과학신학적 접근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너무 사변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

유비의 언어라는 데서 정리됐다. 교리가 아니라 유비다. 이 상상을 채택해도 되고, 방법론적 자연주의로 사고하면서 이것을 신화적 요소로 빼도 된다. 어느 쪽이든 선택이지 요구가 아니라는 것.

쟁점 여섯 — 그리스도인이 되는 조건

맥길크리스트가 자신을 적극적으로 크리스천으로 정체화한다는 대목이 인상적으로 읽혔다. 교회에 나가지 않고 정통 교리도 잘 믿지 않으면서.

제도 교회가 뺄셈의 신학을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자격을 요구하고, 그 자격을 채우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배제한다는 것. 가나안 성도나 냉담자도 자신의 신앙을 말할 자격과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쪽이다.

도약을 강요하는 것도 같은 구조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잘 믿기지 않는 것을 도약으로 채워야 자격이 된다는 논리로 키르케고르가 소환되는 방식. 너무 강한 합리주의도 위험하지만 너무 강한 신앙주의도 위험하다는 것.

그렇다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번 결단했다면 그것을 도구로 쓰지 않고 헌신하는 것 — 그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정리가 붙었다. 실용적 선택처럼 보이는 파스칼의 내기도 실은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거는 것이지, 위험을 피하고 헌신하지 않는 보험과는 다르다는 것.

「너무 확신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 것」이라는 맥길크리스트의 문장이 이 대목에서 여러 번 언급됐다.

쟁점 일곱 — 영성과 종교성은 다르다

영성은 개인적이고 종교와 무관하게도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의 조화에서 느낀 신비감처럼, 지적인 희열 속에서도 영성은 가능하다.

종교성의 핵심은 집단성이다. 한 사회학자가 세속화 시대에 종교가 개인의 영성 위주로 갈 것이라 분석했지만, 그가 함께 강조한 것이 집단적 체험의 공유였다. 개인의 영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

여기서 「비종교적 그리스도인」이 하나의 실마리로 제시됐다. 세속의 시대에 그리스도인 됨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 공동체성과 공공성, 집단적인 공동선의 실천이 그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

미학이 여기 얹혔다. 오래된 성당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 음악, 건축, 전례. 그것들이 우리를 기존의 삶의 맥락에서 떼어내 다른 공간으로 옮기고 성스러움과 접할 통로를 연다. 전례의 내용만이 아니라 전례의 과정 자체가 체험을 전달한다는 것.

쟁점 여덟 — 자기 비움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합일 체험과 같은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했다.

영적 상태로 보지 않는 읽기. 자기 비움은 정체성을 잃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축적해 온 가치 기준과 행동 원리를 버리고 그것들을 다른 각도로 재정립할 토대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

혹사의 언어가 되는 문제. 진보적인 교회 쪽에서도 자기 비움을 채찍질의 언어로 쓴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작 비우지 않는 사람들이 비우라고 말하고, 이미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더 없애라고 하니 견디기 어렵다는 것. 페미니스트들이 이 낱말을 강하게 반대해 온 것도 같은 이유다 — 역사와 성서 안에서 그것이 강압적으로 요구되어 왔기 때문에.

두 종류의 합일이 갈렸다. 대양에 떨어진 물방울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그림과, 의 그림. 후자에서는 나라는 정체성이 분명히 있으면서 서로 맞춰가고 하나 되며, 그 안에 사랑과 희생이 있다. 앞의 것을 경험한 사람도 자기 정체성이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고 증언했다.

고유성 쪽에 무게를 두는 정리도 나왔다. 우주 전체의 크기와 시간에 비하면 별것 아닌 우연 속에서 나라는 고유한 것이 만들어졌는데, 거기에 가치를 두는 것이 이 종교의 독특한 지점이라는 것.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옆 사람의 고유함을 함께 돌보고 키우는 데 그 힘을 쓰는 쪽이라는 읽기다.

곁가지 — 어디서 압도되는가

각자 어디서 그런 경험을 하는지가 이날 자연스럽게 오갔다.

대담에서 한 사람은 갠지스강에 사람들이 함께 들어가는 장면에서, 다른 한 사람은 대학 예배당에서 압도되었다고 말한다.

참석자 쪽에서는 촛불집회가 나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떠밀려 가던 좁은 길에서, 군중이 모여 응집된 에너지를 발산할 때의 숭고한 느낌. 그것이 대담 속 체험과 비슷한 자리였던 것 같다는 것.

음악에서 신앙을 시험할 만큼 강한 체험을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정반대의 증언도 나왔다. 의례나 성스러운 공간에서 오는 신비감이 거의 없고 오히려 답답하다는 쪽. 종교 노동자로 일해 왔으니 그 공간이 작업 현장으로 보인다는 것. 대신 우주의 스케일과 소립자 세계에서 오는 신비감이 압도적이어서, 그것이 종교를 묻게 만든 출발점이었다고 했다. 대담에 나온 세 가지 — 공동체의 유대, 자연과의 친밀함, 성스러운 우주 — 중에서 순서가 우주 → 공동체 → 자연이라는 것.

남은 것

역사가 빠져 있다. 그리스도교적이라거나 영성적이라거나 인간의 실존을 이야기할 때 역사적 맥락을 빼고 우주적 구조의 차원에서만 말하는 것이 낯설고 이상했다는 소감이 나왔다. 그래서 푹 빠져들기보다 거리를 두고 읽게 되었다는 것.

방향성이 있으면 위계가 생긴다. 맥길크리스트는 진화에 목적은 없지만 방향성은 있다고 하고, 아름다움을 그 방향으로 놓는다. 그런데 방향성이 있다면 의식 있는 것을 더 고차원으로 배열하게 되고, 아름답지 못한 존재가 겪는 고통은 어떻게 되는가. 동물이 학대받는 이유가 의식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라면, 이 방향성은 그 위계를 버릴 수 있는가.

여기서 동물 신정론이 소개됐다. 진화의 과정이 동물들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데, 진화를 설정한 신의 창조 세계가 왜 동물의 고통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가. 그리스도교의 언어가 얼마나 인간 중심적으로 형성되어 있는지가 그 물음에서 드러난다는 것.

낱말의 정의가 다르면 대화가 겉돈다. 맥길크리스트는 부정신학적으로 — 무엇이 아니다 정도로 — 개념을 잡고 대화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종교 커뮤니티에도 그대로 필요하다는 데 공감이 모였다. 신·은혜·구원·성서해석 — 서로 정의와 감각이 다른 채로 말하고 있으니까.

신유물론이 다음 주제 후보로 나왔다. 의식이 중심 개념이 아니라 물질 자체의 행위성과 생동성을 말하는 쪽이라, 이날의 논의와 이어지는 자리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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