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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잃은 뒤 애도를 잘 해내지 못했던 시간을 꺼내며, 그럼에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를 밝힌다.
- 10대와 20대를 함께 보낸 친구를 갑작스럽게 잃은 일과, 장례의 마지막 절차 대신 신학교 시험장으로 향했던 그 무렵의 판단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 그때의 문자주의 신앙이 무너졌고 응답을 구하러 여러 집회를 찾아다녔던 시기를 지나, 제주를 떠나며 친구들과 함께 슬퍼할 자리를 스스로 끊어 버린 일을 후회로 남긴다.
- 그 뒤 신학을 공부하며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자기 세계관에서 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는지로 이어진다.
논점
- 이 경험으로 성숙해졌다는 식의 이야기를 분명히 거절한다. 상실은 유감스러운 일일 뿐이고 자신은 여전히 씨름하는 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 이겨내라는 태도가 통하지 않는 일이 있다고 인정한다. 회복탄력성을 좋아하는 성향이지만 잘 울어야 하는 일이 있더라는 것이다.
- 고통 가운데 신도 함께 아파한다는 위로가 자기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자기에게 중요한 것은 다시 만날 기회가 있느냐이며, 그것이 비과학적인 종교의 언어여도 가장 중요한 진리라는 것이다.
- 꿈에서 친구를 본 일을 스스로 만든 환각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그런 만남의 가능성을 말하는 이야기가 기독교에 있다는 것이 자기 중심이라고 말한다.
- 제자들이 부활을 지어냈다는 설명이 사별을 겪은 사람에게 어떻게 들리는지를 짚는다. 슬픔 한가운데 있지 않으면 잡아내기 어려운 지점이라는 것이다.
누가 보면 좋은가 가까운 사람을 잃고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